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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인 엄기원 선생님 <생각이 저요, 저요> 2003. 여름호

아동문학가

by 순한 잎 2006. 1.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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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인 엄기원 선생님        

      ―순수한 서정과 동심을 그려온 40년

 

 

 김경옥(동화작가)    

   5월 15일, '꽃 이야기'라는 소박한 꽃집에 들렀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꽃을 고르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날 나를 행복하게 해준 '누군가'는 바로 엄기원 선생님이셨다. '스승의 날'이라는 뜻깊은 의미와 함께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를 닮은 분홍색 카네이션 한 다발을 골랐다. 안개꽃과 함께 예쁘게 포장하고 있는 주인의 손놀림을 보면서 '사람이 살아온 길도 꽃처럼 저마다의 향기가 배어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꽃다발을 안고 마포로 향했다.
  
무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연둣빛 티셔츠를 입은 선생님은 마치 정원에 계신 것처럼 많은 꽃 속에 파묻혀 계셨다. 나직한 음성으로 '선생님!' 부르며 들어서자 선생님은 꽃보다 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셨다.
  늘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답게 스승의 날을 축하하는 많은 꽃바구니가 선생님의 모습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화사해요. 연둣빛 티셔츠와 꽃이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죠?
   : (소년처럼 수줍어 하시며) 오늘 사무실 올 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왔는데, 오전에 제자들이 이 티셔츠를 사 가지고 왔지. 색깔이 하도 예뻐서 갈아입었는데 참 시원하고 좋네.
   : 화사한 티셔츠를 입고 계셔서 그런지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많이 바쁘셨지요?
   : 아동문학 연구회가 창설된 지 작년으로 20년이 되었거든. 그 동안 회원도 많이 늘고 산만해진 조직체를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싶어 이번에 각 부서를 새로 조직했지. 부서별로 장을 선임하여 선임장을 주고 좀더 활성화된 모습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 일로 좀 바빴어. 게다가 문협 부이사장을 맡다 보니 이런저런 문학 행사에 참여할 일이 참 많네. 특히 4월과 5월은 시상식에, 백일장에, 초록 동요제 심사에, 눈코 뜰새없이 바빴어.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살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 같아. 고마운 일이지.
   : 맞아요.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선생님의 인생과 문학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세요. 어린이 독자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 내가 살았던 시절이라야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지. 나는 또 시골에서 자라서 주전부리감이라야 뭐 있나. 그저 밀서리, 보리서리, 참외서리, 그런 것들이 전부였지. 밀서리 해 와서 불에 구워 먹고……. 또 꿩이나 참새 같은 거 잡으러 다니고. (선생님은 삼태기를 막대기로 고여 놓고 그 밑에 모이를 숨겨 둔 뒤 끈을 잡아당겨 참새 잡는 시늉을 직접 보여 주셨는데, 어렴풋이 선생님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했다.)
  어릴 때 내 꿈은 동요 작곡자가 되는 것이었어.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학예회 때 독창을 하게 되었어. <은행나무 밑에서>라는 노래였거든. 누가 지은 노래인지는 몰라. 그 노래를 부르면서 '아, 나는 어린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서 1955년도에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했어. 강릉사범은 지금의 고등학교와 마찬가지인데 그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마을 학교인 제비초등학교에, 19살 총각선생님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어. 그 때는 6·25사변 직후라 폐허 공간에서 어렵게 교직생활을 했지. 산골학교 아이들은 모두 가난하고 어려웠어. 학교엔 풍금 같은 악기조차도 없이 노래를 가르쳤던 때였지. 그러니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황폐했겠어. 피폐해진 아이들에게 정서를 심어 줄 수 있는 글짓기를 지도하는 일밖에 없더라구. 글짓기는 특별히 필요한 것이 없잖아. 종이와 연필이 있으면 되니까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지도하다 보니 교사도 함께 글을 써야 하지 않겠어?
   : 그것이 아동문학과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겠군요.
   : 그렇지, 그 당시 '글쓰기 교사들 전국모임'이 있었어. 전국적인 모임으로 무척 활성화되었었는데 최일환, 김종상, 이영호, 신현득, 차원재, 박종현, 최춘해, 권태문, 손명희 등 이런 분들이 그 당시 함께 글쓰기 붐을 일으켰던 분들이지.
   : 현재 문단을 이끌어 가고 계시는 아동문학 거장들의 만남이 이미 그 때 이루어졌군요?
   : 그렇지. 지금 현재 모두 아동문학의 중요한 위치에 계시는 분들이지.
   : 이제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는 순수한 서정의 세계와 동심을 엿볼 수 있는데요. 시를 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 나는 30년을 시골(강릉)에서 살아서인지 어릴 때 느꼈던 시골의 정서가 아무래도 내 작품에 많이 나오지. 아이들에게 순수한 서정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서정성과 천진한 어린이들의 생활 모습을 함께 담으려고 해.
   : 지금까지 쓰신 작품이 한 팔백여 편 되지요?
   : 한 천여 편 되지. 아직 발표 안 한 것까지 하면 더 되겠고.
   : 그 많은 시의 소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내시는지 놀랍습니다. 소재를 찾아내는 선생님만의 숨겨 둔 비법이라도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 (허허 웃으시며) 소재 찾는 특별한 법이 뭐 있나. 남들하고 똑같지.
   :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골목길> 작품에 대한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어떻게 소재를 잡게 되셨고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골목길을 가다 퍼뜩 떠오른 시상이었다는 얘길 언젠가 잠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 그 당시는 군사혁명 시절이라 무척 살벌했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복직 발령을 받았는데 동해시 묵호읍에 있는 묵호초등학교였지. 말하자면 진흙땅 마을이었는데 당시 석탄가루가 모두 그 곳에 집결하던 곳이기도 했어. 살벌했던 시대라 그랬는지 묵호 땅의 골목 또한 참으로 어두웠지.
  햇빛도 어두워서/ 못 오나 봐?//……(생략)
  항상 담장 벽까지만 왔다가 가버리는 그런 어두운 골목. 구멍가게의 곶감은 주인 할머니처럼 하얗게 늙었고 해 지는 시간엔 생선 꿰어들고 골목길로 사라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 그런 어두운 풍경을 그렸는데 아무래도 어두웠던 그 시대가 반영되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등단했던 63년 그 무렵부터 70년대 초까지가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을 창작했던 시절인 것 같아.
   : 선생님은 59년부터 조약돌 동인으로 활동하신 걸로 아는데요. 열정으로 함께 글을 쓰셨던 그 때의 문학동지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 조약돌 동인으로는 동시인 김원기(작고하심), 엄성기, 산업대 교수인 박은수, 최종숙, 황태근, 박영규, 신복수 이런 분들이었어. 순수 아동문학을 하던 문학동인이었지.
   :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나 작품집이 있으세요?
   : 물론 있지. 지금까지 낸 동시집 15권 중에 두 번째 동시집이 제일 애정이 가.
  (선생님은 동시집 15권, 동화집 15권, 그리고 교양 도서 70여 권 등 모두 100여 권의 저서를 내셨다.)
  71년도에 낸 <아기와 염소>라는 동시집인데 서정성과 아동의 생활성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집이라고 생각해. 물론 66년에 처음으로 낸 동시집 <나뭇잎 하나>도 내겐 많은 의미가 있는 작품집이야. 등단한 지 3년 뒤에 낸 첫 동시집이었고, 또 서울에 올라온 뒤 우리 쌍둥이 딸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거든. 그리고 우리 아들 종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어.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그 시절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 그림은 왼손잡이 화가인 백영수라는 분이 잘 그려주셨고. 가만 있자, 그 동시집이 있을 텐데.
  (선생님은 서가로 가시더니 동시집을 찾으셨다. 아쉽게도 그 동시집은 없었고 96년 회갑 기념으로 내신 <대장과 졸병> 동시집을 들고 오셔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내 작품 중에 <한 이불 속에서>라는 작품이 있거든. 가족의 끈끈한 정을 나타낸 작품인데, 그 당시는 온 식구가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았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아버지는 아들을 보며 잘 자라주길 바라고, 아들은 또 아버지의 꺼칠한 턱수염을 보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을 갖는 그런 내용이지.
  (선생님은 그밖에 <아기와 염소>, <아기 크는 집>, <나뭇잎 하나>, <모두가 즐거워요> 등의 작품을 설명해 주셨고, 동요로 곡이 붙여진 것은 직접 불러주기도 하셨는데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부르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 82년부터 이끌어 오신 아동문학연구회 이야기를 좀 할까요? 81년까지 선생님은 교직에 계셨는데 그런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기란 결코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그 때 어떤 심정이셨어요?
   : 그 때 나는 서울의 사립학교에서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었지. 알다시피 80년대 초는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으로 어렵던 시대였어. 그 때 김원갑 교수라는 분이 있었는데 무척 강직하고 정직하고 소탈하신 분이었어. 그분이 '국민정신계발협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뭔가 뜻있는 일을 함께 해보자고 권유를 하셨었지.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던 끝에 좀더 큰일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직을 그만두었어. 그런데 김원갑 교수가 사정이 생겨서 얼마 뒤 그게 없어지게 된 거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난감했겠어. 그 때 그분이 참 미안해 하셨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나의 길을 새로 모색한 것이 바로 아동문학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 거지.
   : 아동문학연구소 역사도 어느덧 20년이네요. 지금까지 이끌어 오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아무래도 운영면에서의 경제적인 어려움이지. 문화단체라는 것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크게 마련이지. 한국국어교육학회를 이끌어 오던 김성배 교수도 강의료, 심사료 받은 것을 몽땅 집어넣어 어렵게 운영하셨어. 아동문학연구회도 다달이 고정적으로 나가야 하는 운영비가 있는데 나도 강의료 받은 거나 심사료 받은 것, 그리고 회원들의 회비로 꾸려가고 있지. 다행히 집사람이 번 것으로 생활비는 충당되니까.
   : 사모님 덕을 톡톡히 보고 계시네요. (함께 웃음)
  아동문학연구회 20년의 역사만큼이나 선생님께서 배출한 아동문학가도 상당히 많을 텐데요.
   : 아마 지금까지 130 명 정도 될 거야. 고마운 것은 그들이 내가 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야.
   : 제자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기에 앞서 심어주시는 말씀이 있으신지요?
   : 문학 이전에 '인간'을 강조하고 있지. 특히 우리가 하는 것은 아동문학이 아닌가. 글을 잘 쓰는 재주보다도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먼저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는 마해송 선생님과 윤석중 선생님을 참 존경하는데, 마해송 선생님은 1930∼40년대 일본잡지 <문예춘추>의 편집장을 하셨어. 그 때 어려운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비도 대주시고 먹여주시고 격려해주셨던 훌륭한 분이셨지. 후배 문인들의 하찮은 엽서에도 일일이 꼭 답장을 해주시고 편지도 주시고. 내게는 문학의 은사님이시지. 윤석중 선생님은 80년이 넘게 동요·동시만 지키고 살아오신 분이야. 그리고 절대 남의 말을 안 하셨던 분이야. 여럿이 의견을 낼 때도 그 의견들을 말없이 다 들으신 후에 그대로 따르셨던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이었지.
   : 모든 학문이나 예술은 결국 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기본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 우리 나라에 순수 어린이 잡지가 뿌리박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생각이 저요, 저요!> 같은 이런 순수 어린이 잡지가 많이 뿌리를 박고 잇어야 하는데, 이러한 잡지들이 어린이들의 정신문화를 이끌어줘야 하거든.

  이야기를 나눈 두 시간, 선생님의 40년 문학 이야기를 다 듣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늘 온화한 성품과 겸손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오신 그 길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발자취로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2003. 여름. <생각이 저요 저요> 제 1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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