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의 품격과 투명한 영혼을 지닌
동시인, 유경환 선생님
김경옥(동화작가)
코끝에 봄기운이 묻어나는 날, 나는 유경환 선생님과의 약속 시간을 떠올리며 일산 강촌마을로 향했다.
선생님은 일산의 강촌마을에 사신다. 나는 선생님을 만나 추억의 앨범을 하나하나 들추며 이야기 나눌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은 사흘 전에 지금까지 사시던 아파트의 바로 뒷동으로 이사를 하셔서 집으로 방문하기가 죄송스러웠다. 미처 정리도 안 되었을 텐데 괜히 사모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선생님의 집은 원래 부천 역곡 원미산 아래 200여 평의 넓은 단독주택이었다. 그 집은 사모님과 선생님이 직접 설계하시고 잔디, 나무, 꽃 하나하나마다 온갖 정성을 쏟으며 오랫동안 사셨던 집이다. 그러나 심장병 수술 후, 난방이 잘 되는 곳에서 사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로 인해 아파트로 이사를 오시게 되었고, 그 집은 관리인을 두어 돌보고 계신다. 선생님의 수필집 『나무호미』에 보면 그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걸 많이 느낄 수가 있다. 넓고 아름다운 잔디, 운치 있는 발코니, 아름다운 새소리, 그리고 선생님께서 직접 심으신 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그리우실까!
나는 선생님의 서재가 궁금했다. 많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곳, 선생님의 품격이 가장 많이 묻어 나오는 곳이 서재이리라.
선생님의 서재는 의외로 참 소박했다. 미닫이로 짜여진 서가엔 문학서적과 다양한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널찍한 책상 두 개가 ㄱ자로 붙어 있을 뿐이었다. 역곡집 서가에도 2만여 권의 책이 있다고 하니 책에 파묻혀 한평생을 사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선생님의 서랍 속도 슬슬 궁금해졌다. 선생님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서랍이 아닐까? 이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서랍 속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 보여주셨는데 하나는 여러 배지들이었다. 미시간대학 배지를 비롯하여 아동문학인협회 배지까지, 그리고 행사 때마다 가슴에 달던 이름표도 버리지 않고 죄다 모아놓으셨다.
또 있다. 행사 때면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끼리 돌아가며 사인을 해서 간직한 테이블 메뉴판이었다. 미국에선 흔히 있는 일인데 퍽 의미 있게 느껴져 여러 차례 시도를 했으나 우리들은 별 호응이 없었다고 하신다. 작은 추억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간직하는 분이심에 틀림없었다.
널찍한 책상에는 선생님께서 그리다 만 수묵화가 있었다. 그림 솜씨는 수준급이셨다. 혼자 터득하여 그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데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수묵화의 향내가 서재 가득 풍겨 났다. 한쪽엔 선생님께서 구상하여 초고 상태로 둔 원고더미가 높게 쌓여져 있었다. 얼마나 작품 창작에 열정적인지 대번에 느껴졌다. 이 작품들은 시어를 고치고 다듬고 수많은 고뇌의 날을 거쳐 비로소 세상에 나올 것이다. 쉽게 쓰고 쉽게 발표하는 미성숙한 작가들은 선생님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자제분들이 궁금했다. 이런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어떤 모습들일까?
선생님의 가족은 모두가 박사 학위 소지자로 대학교수라는 직분을 가진 분들이었다. 아드님과 두 따님들, 그리고 사위에 며느리까지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자식농사를 잘 지으셨냐는 물음에,
"해준 거 없어, 그저 자신들이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지."
그러면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이셨는데, 유학 시절 선생님은 자녀들에게 양철로 된 런치박스(도시락가방) 세 개를 사서 보냈다고 한다. 자녀들이 다 자라 이야기하기를 "그 때 아빠 선물을 받고 너무 좋아서 나도 아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지 다짐했다."는 것이다. 역시 자식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은 부모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한 셈이다.
선생님은 내내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가까이 대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 앉아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얼마나 다정다감하시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중학교 때 6.25전쟁을 겪으셨는데 감수성 예민한 문학 소년이 전쟁 당시를 어떻게 이겨나가셨을까 궁금하거든요.
"피난길에 오르면서 나는 마루 밑에 독을 파묻어 그 안에 문학서적을 감추고 길을 떠났지. 그 당시 나는 두 가지 배고픔이 있었는데 하나는 먹지 못한 배고픔과 책을 읽지 못한 배고픔이었어. 그 때는 여러 학교 학생들이 천막교실에 모여서 함께 공부를 했었는데 그 때 농촌을 다룬 소설을 썼던 박영준 씨의 아들인 박승렬, 그리고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아들인 이우현,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삼총사처럼 나란히 붙어 앉아 공부했어. 공부가 끝나면 산이나 들로 쏘다니며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문학 이야기로 피난 시절을 보냈지. 경복고 시절엔 헌책방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책을 사 읽기도 했는데 김소운 수필가의 『보리알 한 톨』,『마이동풍 』같은 책들도 사 읽었어. 학창 시절에 읽은 책 중에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 같은 작품은 내 문학적 기반이 된 책이기도 하지. 그 책을 읽으면서 문학이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를 느꼈으니까."
당시《학원》잡지 모델로도 나와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때 최정희라는 여류작가가 「바다가 보이는 교정」이라는 사진 연재소설을 썼는데 나는 그 때 문학상을 여러 군데서 탔던 터라 그분은 이미 나를 알고, 자기 작품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했어. 그 때 나랑 배화여고 여학생 모델을 각각 따로따로 찍은 뒤 합성을 해서 소설 속에 실었는데 마치 바닷가를 함께 걷는 것 같은 장면으로 연출을 했더라고. 난 그 여학생을 본 적도 없었는데. 그 후《학원》잡지 표지 모델로 나온 적이 있지."
영상이 없던 그 당시 준수한 외모의 선생님이 여학생들 사이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선생님은 고교 시절 문학상을 휩쓸고 연세대에 입학하여 비로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하시게 되었다.
대학 재학 당시《연세춘추》의 기자 생활을 했었거든. 4학년 1학기 때 이미 학점 이수를 다 했던 나는 잡지《사상계》기자 모집의 공개시험을 치뤘어. 그 당시엔 입사 시험을 볼 만한 기회가 사회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던 터라 사상계 공개시험은 매우 관심이 높았지. 그 때 시험을 담당했던 안병욱 교수(철학교수)는 늘 맨 앞에 앉아서 강의를 듣던 학생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더군. '나의 신념에 대해 쓰라'는 시험과 함께 사이언스를 내놓고 번역하라는 것이었어. 전문 용어가 있는 과학책이니 얼마나 어려웠겠어. 그런데 다행히 여러 사람 중에 합격한 사람이 나 하나였어. 그 곳에 기자로 입사한 후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었지. (그 때 사상계의 사장으로 계시던 고 장준하 선생의 처제가 사모님이시다. 그러니까 장 선생과 동서간이 되신다.)
4.19와 5.16을 거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언론사 생활을 하셨으니 어려움도 상당히 크셨겠어요.
"한마디로 정권이 경찰의 목을 메어 끌고 다니는구나 생각했지.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우게 된 시기가 그 때였지. 1958년 현대문학으로 시가 추천되고 나서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인지 그 무렵 내가 쓴 시들은 저항적이고 참여적인 시들이었지. 꽃이 한창 폈을 때 날아온 벌들은 그 때만을 알 뿐이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모르잖아. 내 시에 대해서 늘 서정적인 세계로만 평을 하지만 그 무렵 쓴 시는 분명 저항적이고 참여적인 시였거든. 그러다가 미국 하와이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부터 시가 달라졌지."
이야기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작품 세계로 넘어가고 말았다.
선생님은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하시면서 동시의 폭과 문학성을 강조하시는데 반해 일각에서는 '동시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아이들은 시기별로 그리고 개인의 체험적 수준과 능력에 따라 시를 수용하는 것이 각기 다르거든. 유아기 때는 유아동시를 읽고 청소년기에는 그 시기에 맞는 시를 받아들이거든. 동시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언제까지고 유아동시만을 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시란 것은 자기 내면의 체험적 수준에 따라 그 시를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므로, 시인은 거리만을 제공해야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순화시켜서 다 말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지. 독자는 시를 읽고 나서 자기만의 체험을 바탕으로 확대 재생산하듯이 감상해 나가는 것이 시거든."
시를 쓰시는데 있어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여쭤 보았더니 "요즘 시는 좀 쉬워졌지" 하신다.그리고 작품을 쓰는데 있어 '몰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누구나 사람에겐 지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 내가 체험했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 말이야. 어릴 때 만났던 들길, 고향, 풀잎, 눈웃음, 기대었던 뺨, 억새풀, 부모님……. 지나간 것들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가 그리워지지."
선생님의 시 <오솔길>이란 작품을 보면 그토록 못 잊어 하는 이가 누군지 몹시 궁금해요. 선생님의 수필집에도 '언젠가는 내 마음 속을 밝힐 날이 있으리라' 쓰신 글이 있던데.
그리운 이의 이름/ 연처럼 높이 앞세워/ 그 이름 부르며 부르며 가면/ (하략)
그러나 선생님은 얼굴에 야릇한 미소만을 매단 채 고개를 가로 저으셨다.
"아니, 가슴에 담아두는 거지."
역시 입이 무거우신 분이다. 추억을 가슴에 묻어두실 줄 아는 선생님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마지막으로 시 독자가 점점 줄어드는 현상에 대한 해결 방법을 여쭤 보았다.
"시를 스스로 찾아 읽어야 한다는 독자들의 자각이 필요할 뿐이지. 그러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시를 읽도록 교육을 해야 하고, 시인은 열심히 시를 쓰는 일밖에 더 있겠어."
사실 나는 선생님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을 갖고 있다. 등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계간《열린아동문학지》에 원고를 보냈는데 나의 소홀로 인해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일로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얼마나 매서운 꾸중을 하시는지, 그 날 나는 선생님이 너무 무섭고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밤새 선생님 꿈에 시달렸다.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속에는 말씀은 안 하시지만 며칠 전 혼을 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렇듯 따뜻한 분인 것을……! 그리고 언젠가 출판원고 교정을 도와드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꼼꼼하시던지 동시 원고 하나하나를 대조하느라 나보고 읽으라신다. 스무 편도 넘는 동시와 작가의 주소, 그리고 전화 번호를……. 나는 꼼짝없이 원고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국어책을 읽듯 또박또박 읽고 선생님은 틀린 것이 없나 하나하나 대조를 하셨다. 일에 대해 이토록 철저하고 깐깐하신 분이기에 아동문학인협회 회장 당시 협회의 틀을 정립시킨 업적을 남기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2004년 봄 『생각이 저요저요』 제17호)
김종상 선생님의 문학과 교육 50년 <한국아동문학인협회보> (0) | 2008.07.08 |
---|---|
유경환 선생님 별세 (0) | 2007.06.30 |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 별세 (0) | 2007.05.17 |
동시인 엄기원 선생님 <생각이 저요, 저요> 2003. 여름호 (0) | 2006.01.02 |
박홍근 선생님댁 방문기 <한국아동문학인협회보> 2004. 가을호 (0) | 200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