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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둥글고 작은 밥상 (한국수력원자력 사보)

짧은글, 긴여운

by 순한 잎 2012. 5. 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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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글고 작은 밥상

                                                                         김경옥(동화작가)

 

 

 

   가끔 허기가 진다. 그럴 땐 달콤한 팥이 가득 든 찐빵이 먹고 싶어 찐빵 한 개를 산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새까만 팥이 듬뿍 들어있는 커다랗고 뽀얀 찐빵은, 채 절반도 먹기 전에 질려 내려놓고 만다. 그리고 문득 엄마가 해주었던, 고 작고 노르스름한 찐빵을 떠올린다. 막걸리 반죽으로 부풀려 노르스름하게 빚어냈던 아담한 찐빵! 입으로 가져갈 때면 빵에서 살짝 풍기는 시큼한 술 냄새가 묘하게 입맛을 자극했었다. 나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냄새는 엄마 냄새이며, 함께 했던 우리 가족의 냄새이다.

   내가 찐빵이 먹고 싶은 건, 어쩌면 가족에 대한, 엄마에 대한, 혹은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막 쪄낸 찐빵 앞에서 우  리 가족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먹고 떠들며 정을 나누었었다. 그땐 그랬었다.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 뚝배기를 숟가락 부딪치며 먹었었고, 여름이면 둥근 수박을 한 통 잘라 화채 만들어 온 식구가 나눠먹고 이웃집까지 나누어주던 시절이었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모여앉아 먹던 그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사십 여 년 전, 늦은 밤 까지 잠 안자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 방에 둘러 앉아 아버지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사남매는 그 기다림이 행복하고 설레었다. 오늘은 사탕을 사오실까, 과자를 사오실까? 텔레비전 광고에서 나온 ‘알사탕’이나 ‘줄줄이 사탕’을 사오실거라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다. 여름이면 무거운 수박을 사들고 오시기도 하고, 송이 굵은 포도를 사 오시기도 했다. 겨울에는 호떡이나 호빵, 귤…,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남매에게 줄 간식을 퇴근길에 날마다 사오셨다. 과자 한 봉지라도 손에 안 들린 적이 거의 없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 얘기다. 이 기억은 우리 사남매가 똑같이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다.

   그때는 먹을 게 귀하고, 살림이 넉넉지 못했던 70년대 시절이었다. 날마다 간식을 사왔다고 해서 아버지 주머니가 넉넉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는 조그만 사업을 어렵게 꾸려나가고 계셨고 부양하고 있는 식구들 수도 너무 많았다. 올망졸망 우리 사남매에, 맡아 기르게 된 어린 동생들 둘에, 가정 파탄으로 갈 곳 없어진 조카까지 맡아 기르고 계셨다. 우리집 주변으로는 늘 어려운 가족 친지들이 따라다녀, 나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런 친척들의 고통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짊어졌었다.

어깨에 짊어진 짐 때문에 삶이 힘겨웠을 텐데도 호통 한 번 친 적 없는, 말 수 없고 얌전한 아버지…! 분명 팍팍한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퇴근 길 간식으로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표현했었고, 우리는 날마다 아버지가 사 오시는 간식 덕분에 가난했어도 어린 시절이 풍요로웠던 기억이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떠올리며 언젠가 남편에게 퇴근길에 아이들 간식을 사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일은 쉬운 듯 하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정성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차 세우기가 귀찮아서, 혹은 아무 곳에서나 쉽게 먹을거리를 살 수 있는 요즘인데 뭘 굳이 간식을 사오라고 하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지금, 예전처럼 아버지가 사들고 온 간식에 아이들이 더 이상 기뻐하거나 환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렇게 모였었고,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부모님과 함께 모이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외식을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우리 사남매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주변에서 부러워한다.

   가족을 모이게 하는 힘! 그게 무엇이라도 좋다. 돈이 많은 부모들은 돈으로 가족을 모이게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돈은 이제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권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니까. 그러나 사랑 밖에 가진 게 없는 우리들이라면 지금부터 사랑의 시간을 많이 쌓아놔야 하지 않을까.

  엄마의 정성으로 마련된 맛있는 음식이어도 좋고, 퇴근길에 아빠가 사온 통닭 한 마리여도 좋다. 비록 작은 것이어도 둥글게 둘러앉아 얼굴 마주하며 먹는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훗날 우리는 모두 외롭지 않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가족 얼굴 보는 시간보다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 특히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 외로움이 더 크다. 아이들은 제 시간 보내기에 바쁘고, 집에 있는 날도 제 방에서 보내는 일이 허다하다. 가족 간에 대화가 거의 사라졌다. 남편들도 직장일로 바쁘다. 경쟁사회를 헤쳐 나가기 위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일에 투자한다. 일주일에 고작 몇 시간이나 가족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눌까를 따져 보면 쓸쓸해진다.

   훗날 내 자식들은 ‘가족’에 대해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아버지가 사온 간식을 기다리던 오붓했던 가족에 대한 추억이 있을까. 푸짐하게 쪄낸 찐빵 앞에서 웃던 가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가족을 모이게 하는 힘, 그건 바로 어릴 때부터 쌓인 가족 간의 사랑과 추억일 것이다.

  조그만 밥상에 둘러앉아 얼굴 가까이 맞대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커다랗고 네모진 식탁이 아닌, 둥글고 작은 밥상이 필요한 때다. *

                                    

                                                                    <수차와 원자로>. 2012. 5.

 

 

울 엄마랑 아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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