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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꽃과 창문 (롯데 사보)

짧은글, 긴여운

by 순한 잎 2012. 5. 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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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사보)

                                                                     등나무꽃과 창문

 

                                                                                            김경옥 (동화작가)

 

오월과 유월, 바로 요맘때 피는 꽃이 있다. 바로 보랏빛 등나무꽃이다. 나는 등나무꽃을 볼 때면 가슴에 보랏빛 설레임이 일곤 한다. 그 설레임은 불혹의 나이마저 잊게 하며 나를 사춘기 소녀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등나무꽃이 나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가장 순수했던 소녀 시절의 첫사랑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어릴 적 우리 옆집에는 나보다 한 학년이 낮고 나이로는 두 살이 적은 남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는데 나는 그 아이를 좋아했다. 지금이야 연하의 남자를 사귀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때 초등학생이던 나는 동생뻘 되는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해 마음 깊숙이 숨겨놓았던 일급비밀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등나무꽃을 좋아해 집이 온통 등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등나무로 덮인 그 집을 지나갈 때면 나는 숲 속을 연상했고 그 아이를 보랏빛 성에 살고 있는 왕자님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주렁주렁 드리워진 보랏빛의 싱그럽고도 신비로운 등나무꽃! 그 아이가 밖에 나와 노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기에 그의 존재는 신비로웠다.

그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우리 집에서 함께 살던 삼촌은 자주 기타를 쳤다. 나는 삼촌에게 기타를 배운다며 서툰 솜씨로 로망스를 뜯기도 하고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하는 가요를 퉁기곤 했었다. 내가 기타 배우기에 푹 빠져있을 무렵, 그 아이의 집에서도 기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그 아이의 기타 실력은 점점 좋아지더니 자랑이라도 하듯 아예 우리 세 자매가 쓰고 있는 방 창문 담벼락 밑에 의자를 놓고 앉아 여름밤이 깊도록 친구와 함께 기타를 치는 것이었다.

여름 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 아이의 기타 소리는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마치 로미오가 줄리엣의 방 창문아래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던 것처럼 그도 나를 위해 기타를 치는 것 같은 설레임에 휩싸였다. 그 아이는 툭하면 옥상에 올라가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리고 옥상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의 존재를 의식하며 다소곳이 걸었다.

그런데 얼마 뒤 우리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아이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손을 붙잡고 울면서 서운해 했다.

그 후로 그 아이와 등나무꽃은 내 기억속에서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스무 살 무렵에 그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는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우리는 무척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노래를 한답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낮에는 카페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나는 삶의 목표조차 없어 보이는 나의 첫사랑에게 실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반듯한 청년이었다.

나는 그를 우리집에 초대했다. 엄마도, 언니도, 동생도, 너를 보면 반가워 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그가 음반 두 장을 사들고 놀러왔다. 우리집 식구들은 그를 반겼고 오랜만에 그를 본 동생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동생도 어쩌면 나처럼 그를 몰래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등나무꽃에 얽힌 전설처럼 말이다.

 

신라시대 한 농부가 착하고 예쁜 딸 자매를 두었는데 그들은 화랑 한 사람을 서로 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싸움터에 나간 화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자매는 연못가에서 부둥켜안고 울다가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곳에서 두 그루의 등나무 싹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언니인 보라꽃은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동생인 흰꽃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 해마다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냈다.

 

며칠 뒤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어린 시절, 이웃으로 함께 보냈던 우리는 성인이 되어 술이란 것을 앞에 놓고 추억을 마셨다. 그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누나가 내 첫사랑인 거 알아?”

나는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는 우리 세 자매의 방 창문을 바라보면 늘 설레였다고 고백했다. 아마 그건 꼭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은 옆집 누나들을 통해 이성을 동경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떠나고 난 뒤, 우리 방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했다고 말했다.

‘너도 내 첫사랑이었어.’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꾹 누른 채 나는 그저 누나처럼 그를 나무랐다.

“지금의 모습은 네가 아니야. 넌 이렇게 살 아이가 분명 아니었어.” 하고 말이다.

그날 이후로 그를 만난 적은 없다. 그리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친정 엄마에게서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뒤늦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했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며 해외에 나가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 그가 결혼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친정 엄마도 그의 엄마와 아예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보라색 등나무꽃은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첫사랑을 떠올리게 만든다. 보랏빛의 싱그럽고도 신비로운 등나무꽃!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한 소년을 만나 첫사랑의 향기에 취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때의 설레임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미세하게 내 가슴을 울린다. 그 울림은 권태롭고 지친 일상에 작은 활력을 주며 작가인 나에게 끊임없이 예민한 감수성을 제공해준다.

가끔 나는 친정엘 가면 낡은 앨범을 들춰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여고생이던 언니가 그 집 대문 앞에서 등나무꽃을 만지며 찍은 사진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집 등나무꽃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없다. 나는 언니의 사진 속에 남아있는 보랏빛 그 꽃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아직도 첫사랑의 설레임을 혼자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다.*

 

                                                                                                         샤롯데. 2008. 6.

 

 

 

 

 

 

일러스트 최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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