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올 해도 내년에도 꽃씨로 남을 사람(선진피플 사보)

짧은글, 긴여운

by 순한 잎 2009. 2. 11. 00:08

본문

 
 

책상 위에 놓인 달력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했나?’ 곰곰이 생각 합니다. 탁상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바쁘게 살아 온 흔적이 가득합니다. 달력의 칸칸마다 새까만 것을 보면요.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칸칸마다 적혀있는 흔적들은 대부분 일과, 혹은 가족과 관련하여,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디를 가는 일이었습니다.
책상 서랍도 열어봅니다. 잡다한 문구류, 그리고 통장과 도장 따위가 있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제가 평소에 사둔 편지지와 편지봉투, 엽서입니다. 요즘은 이메일 때문에 편지지에 편지 쓸 일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쁜 엽서나 편지지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문단의 가까운 분들이 보내주었던 편지와 엽서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그립고 고마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잡다한 물건들 속에서 또 하나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꽃씨입니다. 올 여름과 가을에 누군가에게 받은 씨앗들입니다. 봉숭아, 접시꽃, 분꽃. 맨드라미. 씨앗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봉숭아꽃씨는 가전제품 수리를 하러 갔을 때 상냥하고 예쁜 여자 직원이 건네준 것입니다. 고객 서비스를 담당하는 곳이라 손님들에게 친절했는데 마지막에 꽃씨를 건네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접시꽃은 옆집 아주머니가 준 것입니다. 옆집 화단 앞을 지날 때면 나는 분홍 접시꽃을 탐내며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나를 보았는지 여름 끝자락 무렵 편지봉투에 담아 건네 준 것입니다. 분꽃은 어릴 때 추억이 있어서 좋아하는 꽃인데, 어느 집 화단에 분꽃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일요일 남편과 함께 저녁 산책을 할 때면 그 집 화단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분꽃더미 속에 얼굴을 박고 받아놓은 꽃씨입니다.
“꽃씨” 하고 소리를 내보면 왠지 마음이 예뻐집니다. 연필로 ‘꽃씨’라는 글자를 적어보면 어쩐지 글자도 예뻐 보이고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꽃씨 속에는 우주가 담겨있고 삶이 담겨있다고들 합니다.
저는 꽃씨를 보면서 ‘내년’을 생각합니다. 한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것은 어쩌면 ‘꽃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을 피우느라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더니 단단한 씨앗을 똑 떨구었습니다. 비록 씨앗을 많이 맺지 못하고 단 한 개뿐이라고 해도, 얼마나 야무진 마무리입니까. 성과가 크든 적든 이 해가 가기 전에 이처럼 야무진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아마도 내년을 더 기쁘게 기다릴 수 있겠지요.

사람 사이도 꽃씨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저에게 이런 걸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 엄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 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무슨 생각으로 사랑을 묻는 걸까? 혹시 좋아하는 남자친구라도 생겼나? 아니면 엄마의 사랑이 줄었다고 생각해서 묻는 것은 아닐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음…, 마음에서 꽃이 피어나는 게 사랑 같은데?”
어쩌면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린 대답 같기도 하고, 어쩌면 너무나 철학적인 것 같은 대답을 해놓고 저는 그 다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꽃은 왜 피어난다고 생각해요?”

“음, 그건 마음이 따뜻해졌기 때문이지.”
“그럼 마음이 따뜻해져서 꽃이 피었다가도 그 꽃이 시들 때도 있겠네요?”
“그럼. 시들 때도 있지! 그런데 단단히 여문 씨앗 하나를 똑 떨구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또 꽃을 피울 수 있는 거야.”
아이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속의 씨앗을 보면서 저는 문득 그날 딸아이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사람 사이도 이런 꽃씨와 같은 것은 아닐까? 가슴에 따뜻한 물이 올라와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는 관계.

저는 올 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만날 때마다 마음에 따뜻한 물이 고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건조한 황사 바람만 휙휙 부는  이도 있었습니다. 나 역시 상대의 마음에 따뜻한 물이 그득 고이게 하는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꽃씨처럼 또 내년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올 해 나는 어떤 사람에게 꽃씨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는가. 다음해로 넘어가는 이때에 그들의 수첩에서 내 이름 석 자가 함부로 지워지지는 않았는가. 내년에도 나는, 그들에게 그 다음해를 기약할 수 있는 꽃씨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올 한해 좋은 사람들 만난 것에 감사하며, 내년에도 좋은 인연을 기대해봅니다. 내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꽃씨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선진피플> 사보. 2006년 11.12월호

 

글_김경옥(동화작가) 196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아동문예>로 문단활동 시작했다. 동화집으로, <그 별의 비밀 번호>, <사고뭉치 삼돌이>, <날개를 단 돼지저금통> 등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