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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득선생님을 찾아서 (열린아동문학 2010 가을호)

아동문학가

by 순한 잎 2010. 11. 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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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창작열로 동시문학의 큰 숲을 이룬,

신현득 선생님

“저는 하루 종일 창작하느라 바쁩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못 쓸 정도예요.”

 

대담: 강원희, 배익천, 소중애, 이규희, 이동렬, 홍종관 기록․정리: 김경옥

 

 

8월 25일, 하루 종일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신현득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 위해 서울 지하철 4호선 쌍문역 2번 출구 앞으로 작가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부산에서 오신 홍종관 열린아동문학 발행인과 배익천 선생님을 비롯해 편집위원들이 다 모이자 빗줄기도 그치고 덥던 날씨는 거짓말처럼 시원해졌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 맞이하는 손님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데…, 우리의 이런 걱정을 하늘이 시원스레 해결해준 것이다.

하얗게 바래인 삼베옷을 입은 선생님이 함박웃음으로 우릴 맞이해 주셨고, 사모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와 포실포실하게 쪄낸 감자로 우릴 정겹게 맞아주셨다. 선생님 댁은 참 소박했다. 거실과 방엔 온통 책만 있을 뿐, 사치스럽거나 요란한 물건은 전혀 없었다. 굳이 요란한 것을 하나 들자면 손자 손녀들의 귀여운 사진을 거실 벽에 주욱 붙여놓은 것 정도랄까. 사모님이 내주신 간식과 차를 미처 들기도 전에 선생의 강의는 벌써 시작되었다.

우리 아동문학 연구를 하신 석학답게 잘못 알려진 사료들을 지적하신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少年』지에도 붉은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책과 자료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나라 아동문학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셨다. 선생님의 짧은 강연을 들은 뒤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을 이어나갔다.

요즘 더위에 어떻게 지내셨나요? 요즘도 여전히 강의 나가시고 많이 바쁘신지요? 하루일과를 주로 어떻게 보내시나요?

- 나는 다행히 더위를 안타는 편이라 잘 지냈습니다. 요즘 강의는 안 합니다. 나이가 드니 일을 시키지 않더군요. 그 동안 강남대, 서울예대, 한양여대, 인하대 등에서 강사와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였고, 단국대 강의를 끝으로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강의는 안 나가지만 괜히 바쁩니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서 부르면 나가야 하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창작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써야 할 만큼 바쁩니다. 요즘 「세계아동문학사」를 집필, 초고를 끝내었어요. 두어 차례 수정을 해서 출판을 할 계획입니다. 2~3년 뒤가 될 것 같아요. 창작을 주로하고 그 외의 집필은 그 여가에 하다보니 시간이 걸리지요 .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동시사 연구로 학위를 받으셨죠?

- 동시사 연구를 했지만 새로 고쳐 써야 할 것이 많아요. 그 이후에 찾아낸 자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방정환 선생이 문학 초기에 소설도 쓰고 일반 시도 썼다는 사실 등입니다. 이런 자료는 다 보관해 두었지요. 언젠가는 다시 작업을 해야 합니다. 「동시문학사」보충작업을 하고 나면 출간을 할 계획입니다만, 몇 년이 걸릴지….

시간의 대부분은 창작하는 일에 보내고 있어요. 창작이 재미있습니다. 하루 종일 작품 쓰는 일에 몰두합니다. 작품을 쓰다보면 가속도가 붙어요. 시간이 없어서 다 못 쓸 정도예요. 계획된 것도 많고 곧 책으로 나올 작품도 있습니다. 금년 12월경에 동시집이 나올 예정이고 「동시조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년 중반쯤엔 「수수께끼 동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실험적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미간(未刊) 동시원고도 2권 분량이 있고 일반시집도 내년 쯤 낼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마누라와 나는 동갑인데 한 마을에 살았고, 18살에 만나 결혼했습니다.(갑돌이, 갑순이 이야기로 웃음.) 자녀는 첫째가 딸이고 그 밑으로 아들이 둘인데 손녀들이 많아 딸부잣집이에요. 손자 하나에 손녀가 다섯 명, 거기다 증손녀까지 있어요. 증손녀 이름이 유진이인데 (사진을 떼어내 보여주며) 아주 귀엽습니다. 내가 쓴 <유진이>라는 작품도 두 편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아명이기도 한 옥중이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 살 때부터 몇 가지 기억이 나요. 보리둑(보리수) 열매를 따거나 봇물에서 논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종조부가 계시는 만주로 이주를 했어요. 러시아의 작가 바이코프가 쓴『위대한 왕』이라는 작품은 만주 밀림의 호랑이왕이 인간에게 어떻게 대응하며 살았는가를 내용으로 한 동물소설입니다. 이주한 곳이 이 호랑이의 활동무대였지요. 작품에 나오는 마이허(馬蟻河) 강가에서 살았어요. 백두산에서 흐르는 송화강 지류인데 이 강물에 거품돌(화산재가 쌓여서 된 구멍이 많고 가벼운 돌)이 떠내려왔어요. 그 돌을 건져내 빻아서 놋그릇을 닦는데 쓰기도 했지요. 출몰하는 마적단을 막기 위해 마을 둘레에 토성을 쌓아 놓고 만주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그 뒤 길림으로 와서 둘째누님을 시집보내고, 또 다른 시골로 갔다가 만주생활에 적응이 어려워, 아홉 살 되던 봄에 고향 의성으로 되돌아왔지요. 그해 4월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식민지교육을 받았어요. 한글은 가르쳐주지 않고 일본말만 배웠지요. 내 형제는 6남 3녀였는데 내가 5남이었습니다. 이중 3남 2녀만 살았어요. 아이들이 자꾸 죽자 ‘옥과 같이 중하다’는 뜻으로 나를 ‘옥중(玉重)’이로 불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해방직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날 산골에다 토끼덫을 놓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엉엉 울었죠. 그 뒤부터 옥중이는 밥을 지어먹었어요. 형님은 만주로 공부하러 가고 남동생과 나와 아버지 3부자였으니,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요. 키질도 하고, 물도 이어다 나르고, 나무도 했는데 그 중 디딜방아를 찧는 일이 제일 힘들었어요. 옥중이는 고생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5학년 때 해방이 되고, 졸업 후 2년 동안 신평면사무소 급사노릇을 한 고생경력이 또 있지요.

선생님은 동시 「문구멍」을 비롯해, 「옥중이」, 「고구려의 아이」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처음 시를 쓰시고 발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또 상주에서의 교직생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나는 중학교 때부터 글을 썼어요. 당시 시골에서 아동문학이라는 말은 못 들었고, 시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중학생 때, 김동명의 시집『三八線』을 읽고 나도 이처럼 시를 써봐야겠다며, 공책 한 권에 써서 국어 선생께 드렸더니 칭찬은커녕 공책도 돌려주지 않으셨어요. 안동사범학교에 진학했는데 습작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국어 선생께 드렸더니 교실에 갖고 오셔 칭찬하시며 여러 학생들 앞에 이야기해주셨지요. 이로부터 문학하는 학생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종상 선생과는 중학교 사범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사범학교를 나와서 1년간 의성에서 교직생활을 했는데 신경쇠약증에 걸려 고통이 대단했어요.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상주로 옮겼지요. 그때 상주에서 교육회주최로 백일장이 열렸는데 아이들을 지도해서 상주에서 1등을 했어요. 경북 도대회에 뽑혀 나가 3등을 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상주에서 글짓기 운동이 시작됐어요. 김종상 선생이 이웃학교에 있어 협력이 잘 이루어졌어요. 새싹회 대회에서도 두 학교 모두 나란히 으뜸상을 받았고, 대구 김성도 선생이 주관하시는 계성학교 글짓기에서도 뽑혔어요. 김종상 선생이 교장으로 모시는 박로익 선생(현재 수필가)이 계셨어요. 실제 상주의 글짓기에는 이분의 열성과 격려의 힘이 제일 컸습니다.

계성중고등학교에 재직했던 김성도 선생은 아동문학가이면서 작곡가였지요. 나를 키워주신 은인이십니다. 얼마 뒤 <동시공부>라는 책을 펴내신 김동극 선생도 상주에 장학사로 오셨어요, 이분은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1인자가 되셨지요. 최춘해, 강세준, 권태문, 이천규, 이오덕 선생 등이 어울렸어요. 우리는 그때 무료로 야간지도까지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쳤어요.

1959년, 상주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신춘문예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 ‘문구멍’이었습니다. 12월 29일 경 소년조선일보에 앞당겨 발표가 되었는데 교내 이발소 주인이 오려서 붙여놓은 것을 보고 가작에 뽑힌 것을 알았습니다. 뒤에 윤석중 선생께 들은 이야기였는데 ‘상주국민학교 신현득’이라 기명을 했으니 어린이 작품인지 성인 것인지 잘 몰라서 당선작으로 하지 못했다 하셨어요. 그 이듬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보내어 동시「산」이 당선되었지요.

선생님은 해마다 작품집을 내실 정도로 창작활동이 왕성하신데요, 현재 동시집만 20권이 넘죠? 정확히 몇 번째 동시집까지 나왔나요? 그중에 특히 애착이 가는 시집은 무엇인가요?

-해마다 내진 않았고요, 현재까지 나온 동시집은 22권입니다. 애착이 가는 시집은 글쎄요…, 생각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작품집을 내고 나서 다시 보면 작품이 허술하다고 느껴져 다듬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선생님만의 창작 기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시상이 떠오를 때면 어디서든 몽당연필을 꺼내들고 시를 쓰신다는 일화로도 유명한데, 창작에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창작 비법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특별한 창작기법은 없습니다. 그저 부지런히 쓰는 것뿐이지요. 몽당연필은 버리기 아까워서 대롱에 끼워 쓸 수 없을 때까지 쓰지요. 그런 몽당이를 성냥곽에 모아 둔 것이 있어요.

열정적으로 시를 쓰시고 시 교육을 펼치셨던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정서와,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느껴지는 정서는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나,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 젊은이들을 보면 힘이 나지요. 작품의 차원을 한층 높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보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아동문학의 앞길은 밝습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만 선배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이가 있어요. 잘했든 못했든 선배가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아동문학이 있는 것입니다. 선배들과는 담을 쌓고, 단체와도 담을 쌓아 놓고, 후배들 중에서 쓸 만 한 사람만 뽑아서 그룹을 형성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은 도덕적인 죄악입니다. 이런 사람은 잡지를 새로 창간해도 선배들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선배들이 이뤄놓은 길을 걷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고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의 스승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역시 기억에 남는 스승이나 선배가 계셨을 법한데, 들려주실 만 한 일화가 있으신지요?

-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과 5학년 때 은사를 존경해서 자주 찾아뵙곤 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어요. 4학년 때 은사님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오래 전에 세상 떠나신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문단의 선배이신 소파 선생은 내가 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뵙질 못했어요. 나를 문단에 내어주신 윤석중 선생과 이원수 선생을 존경했습니다. 나를 길러주신 김성도 선생을 존경하였고, 대구아동문학회장을 지내신 이응창 선생과 어효선 선생은 인격적으로 추앙할만한 분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보면 두 번째 동시집 『고구려의 아이』등에서 엿볼 수 있듯, 테마가 굵직하거나 민족적인 이미지가 강한 시들이 많아, 시인의 큰 기상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즘 시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 내가 등단하기 이전에는 동시의 소재가 자연물이나 생활소재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역사참여가 시작되었지요. 역사 속에서 소재를 개발하고, 통일염원을 시에 담게 되었습니다. 또 우주에 관한 테마에도 관심을 갖고, 첫시집부터 「별나라 동무들에게」등 색다른 소재의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재개발로 동시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지요. 성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소재를 개발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수수께끼 동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동시집 외에 일반시집도 내신 것으로 아는데 『고향의 시어』나 『고비사막 눈썹달』시집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의 일상의 내면이 가깝게 다가오고,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동시와 달리 시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모더니즘이 시에 적용되고부터 일반시의 표현이 모호해서 독자에게 난해해졌습니다. 난해시로 인해 시를 모르겠다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나왔지요. 특히 50년대에서 70년대의 시가 그러했습니다. 그러했던 시가 리얼리즘을 수용하고부터, ‘비추상의 기법’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동시가 100년 동안 지켜온 시법입니다. 그런데 이 영역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모더니즘을 고집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일반시가 동시를 닮아가서 쉬워지고 있어요. 이들 일반시의 동시영역 침입으로부터 동시를 지키는 수단은, 우리도 동시의 기법으로 일반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큰일을 위해서 동인 모임을 만들어도 좋지요. 이것이 온 국민이 시를 즐기고, 온 국민 모두가 시를 쓰는 ‘국민의 시’가 되리라 믿습니다. 동시의 방어수단이죠. 나의 일반시는 동시의 기법입니다. 소재만 성인사회에서 가져온 것일 뿐 어려운 구절 하나도 없는 ‘국민의 시’ 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셔서 문학의 타장르 보다 동시를 항상 우위에 둘 정도로 때론 강한 집착을 보이십니다. 이런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건지요?

- 동시는 시의 원형질입니다. 인간의 자아 한가운데에 있는 동심을 노래한 것이 동시이거든요. 그러므로 동시는 시중의 시입니다. 동시는 아득한 옛날에 동요라는 이름으로 선사시대부터 있었어요. 이것은 완전히 어린이 세계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동시의 기법만 가지면 모든 이미지의 시를 다 쓸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지요. 그러므로 모든 시중에서 동시를 제일 상위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미성에서도 동시보다 더한 시는 없어요. 요즘은 일반시인들도 동시를 많이 씁니다. 일반시인이 동시집 한 권을 내면 신문에 기사를 내주고 광고 실어주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계아동문학사에서 확인된 것이, 한국의 동시가 세계제일이란 것이에요. 특히 젊은이들 작품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를 자랑 삼고 작품을 세계로 수출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은 동시문학의 나아갈 바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셨다.)

끝으로 문단의 원로로서 우리 문단에 바라고 싶은 점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리나라는 국문과를 나와도 아동문학을 모릅니다. 대학도서관에는 현대문학이 분명한 아동문학 자료를 보관하지 않아요. 현대문학사에도 아동문학을 빠뜨려놓고 있습니다. 이런 불구(不具)의 역사를 국문과 학생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국문과를 나와도 어린이 시절에 자기를 길러준 아동문학의 ‘兒’자도 모르게 됩니다. 이런 학사들이 사회에 나가서 신문기자가 되고, 교사가 됩니다. 자기를 길러준 문학을 모르도록 아동문학盲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세계에 이런 예는 없습니다. 죄악 아니고 뭡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죄악은, 삼팔선 그어서 동족상잔 시킨 것이고, 그 다음이 문단에 계급을 둔 죄악이에요. 이 문학의 계급성을 타파해야 합니다.

아동문학을 현대문학사 안에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현재의 문학사 집필자로는 안 됩니다. 아동문학가 가운데서 문학사 전공자가 나타나서 아동문학과 여타의 문학을 같은 선에 놓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인(偉人)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에 앞서 ‘아동문학 권익운동’을 일으켜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현득 선생님과의 대담 내용을 기록하는 동안 아동문학을 향한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작가라면 누구나 마음판에 새겨둔 그 말….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팔십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넘쳐나는 창작열로 오로지 시 쓰기에만 골몰하시고, 창작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노시인! 신현득 선생님에 대해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미 주옥같은 작품들이, 그리고 앞으로 탄생될 또 다른 작품들이 시인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까.*

<열린아동문학 2010년 가을호(46호)>

 

          

                                          검소한 선생님댁 거실 풍경 (사모님과)

 

                                            집에는 온통 책과 원고뭉치들뿐...

 

선생님의 모자 삼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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