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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연 선생님을 찾아서 (열린아동문학 2009. 가을호)

아동문학가

by 순한 잎 2009. 11. 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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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아동문학- 아동문학의 오래된 샘 2


         바늘귀만큼의 시력으로 평생 동화의 샘물만을 퍼 올린,

         이준연 선생님.

         -나를 동화작가로 만들어준 내 눈을 나는 사랑합니다.

  

                          대담: 편집위원(이동렬, 강원희, 소중애)/ 기록․ 정리: 김경옥

                                        

원로탐방 두 번째로 편집위원(강원희 이동렬 소중애)들이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이준연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후배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설레어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는 선생님! 어린애처럼 천진한 얼굴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계셨다.

집안 분위기가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동화작가 두 따님들이 아버지 곁에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집안 곳곳에는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오로지 동화에 대한 열정만을 안고 살아오신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그동안 출간된 수많은 저서들. 더 이상 받을 상이라곤 없을 것 같은 많은 상장과 상패들. 그리고 주옥같은 작품이 탄생되어 나온 오래된 앉은뱅이책상, 그 위에 놓인 선생님만의 커다란 특수 원고지.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 볼 수 있는 예전의 사진들. 이 모든 것들이 선생님 삶을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병마와 싸우고 극도로 안 좋은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처럼 한평생 동화의 샘물만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2011년은 ‘이준연 동화문학 5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시간을 거슬러 그 삶의 흔적들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 참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선천적으로 시력이 아주 나쁜데도 많은 동화를 쓰셨지요. 그리고 한때는 위암과 담석수술을 해서 다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건강을 회복해 다시 펜을 잡으셨습니다. 요즘은 건강이 어떠신지요?

-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예전만큼 외출이나 글을 왕성하게 쓰지는 못하지만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면서 편안히 지내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준연 인간론’을 쓸 때 선생님의 고향 마을을 가 봤습니다. 저수지가 있고, 마을이 아주 아늑한 참 좋은 곳이더라고요. 고향이 전북 고창군 해리면 안산이라 아호도 ‘안산(安山)’으로 쓰시잖아요? 선생님은 고향에서 언제 태어나 몇 살 때까지 사셨는지요? 그 고향 이야기와 개구쟁이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이동렬)

- 1938년 4월 7일 전북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 393번지에서 태어났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전주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기 때문에 고향에는 방학 때마다 내려갔습니다. 1962년 서라벌 예술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 1979년까지 살았습니다. 

안산마을은 전주 이 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 마을입니다. 어릴 적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다니면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들은 전래동화가 내 동화의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내 동갑내기 개구쟁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었는데, 어른들은 우리들을 ‘호랑이패’라고 불렀어요. 동화 ‘지워지지 않는 일기’, ‘비오는 날의 도깨비’는 개구쟁이 시절, 고향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6.25때 사상이 다른 분들한테 아버님까지 학살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상황이 작품으로도 우러났을 텐데요. 그런 작품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가정사와 연관 지어 말씀해 주시지요.

-1950년 여름은 평화롭고 행복했던 우리 집에 불행과 슬픔이 닥쳤습니다. 한국전쟁이 났고, 추석날 밤에 아버지는 지주라는 이유로 끌려가서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장편 소년소설 <푸른 하늘에 붉은 구름이>(소년한국일보 200회 연재)는 내가 겪은 6․25 실화를 인명, 지명을 바꾸어서 쓴 것입니다.

전주로 전학 와서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고등학교를 마치신 걸로 아는데 전주생활의 추억담 좀 들려주시죠. 당시도 교내 문학 활동을 하셨는지요?

-1950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과 나는 트럭을 타고 전주로 이사를 갔어요. 갑자기 환경이 바뀐 전주 생활은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아이같이 험난한 생활이었어요. 밤에는 꿈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서 재미있게 놀았어요. 안산마을, 해리초등학교에서는 골목대장, 우등생, 반장, 왕자님이었는데, 전주로 와서는 거지왕자가 되었어요.

1951년 이른 봄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밭에 커다란 텐트집이 생겨났어요. ‘제2성결교회 부흥회’ 였는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회로 뛰어가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목사님이라고 생각했어요. 목사님이 되면 천당에 갈 수 있고, 천당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목사가 되려면 예수학교(기독교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주 신흥 중․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초, 중, 고 시절에는 웅변부에서 활동했어요.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려면 웅변부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성경과 많은 책을 읽었고 글 쓰는데 재능이 있었지만 교내 문학 활동은 대학에 다니면서 했습니다.

문학 이야기에서 잠깐 말머리를 돌려보겠습니다. ‘이준연’하면 ‘하모니카 연주’가 연상되거든요. 그 하모니카 연주는 언제,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 하모니카는 내 친구 1호이지요. 해리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형을 만나러 전주 집으로 갔어요. 형 공부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저 소리는 아리랑……. 손풍금, 가야금, 기타, 피리 소리는 들어봤지만…….’ 나는 방문을 활짝 열고 형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어요. 형님은 내게 촌놈이라고 농담을 하면서 하모니카를 가르쳐주었어요.  아버지는 제 하모니카 연주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아리랑’, ‘타향살이’를 불면 손뼉을 치시면서 칭찬을 해주셨지요.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게 하모니카를 선물로 사주셨어요. ‘야마하 29 토레스 c조’였는데 그때 받은 하모니카가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형과 내 하모니카는 북한 인민군이 우리 집 재산을 몰수해 갈 때 없어졌어요.

다시 문학 쪽으로 갈까요? 4년제인 중앙대학교를 다니시다가 2년제인 서라벌예술대학을 다시 들어가셨는데, 일반인들은 이점이 이해가 잘 안 되거든요. 왜 그러셨어요?

- 1960년 4․19 혁명은 우리 집에 큰 변화를 가져왔어요. 형님이 7․19 국회의원 입후보를 했다가 낙선을 했어요. 당시 중앙대 국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형님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때 절망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쓰레기로 버려진 절름발이 인형(작품 소재)이 나에게 ‘신춘문예 당선’의 행운을 가져다 준 거지요.

평소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저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문예창작과에서 작가 수업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에서만 본 문인들이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있어서 지도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61년 4월,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감류장학생으로 편입을 했어요.

서라벌 예대에서 문학 창작 수업을 받으실 때 우리나라의 문단계의 유명한 서정주․김동리․조연현․안수길 같은 작가들한테 이론과 창작 수업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왜 성인문학의 시나 소설이 아닌 아동문학을 택하셨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 학창생활 14년 중에 가장 행복하고 보람되던 시기는 서라벌 예술대학 1학년 때였어요. 당시 ‘영시’문학동인 활동을 했었는데, 총 아홉 명이 활동했어요. 시는 서정주 선생님, 소설은 김동리 선생님이 지도해 주셨는데, ‘0시 동인지’ 이름(0시로 12시 이후 새로 시작하는 출발 시간을 의미함)을 서정주 선생님이 지어주셨고, 김동리 선생님이 서문을 써주셨어요.

나는 당시 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 가까운 사람들한테 소설과 동화를 보여주었는데 대체로 동화가 더 좋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1960년에 소설과 동화를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소설은 떨어지고 동화가 당선되었어요. 나는 그때 내가 동화 쓰는데 더 재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훌륭한 동화작가가 되고자 온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시력이 좋았다면 교사, 신문기자, 작곡가가 되었을 겁니다. 나는 바늘귀만큼 열린 내 눈을 고맙게 생각해요. 시력 때문에 상상력이 풍부했고, 작가가 되었고, 특히 순수한 어린이 세계에서 평생 살 수 있는 동화작가가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마해송․강소천․김성도․김영일․박경종․박홍근․박화목․이원수 같은 선배 분들과도 문학적인 친분이 있으셨는지요?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마해송, 강소천, 김요섭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시상식이 끝난 뒤 강소천 선생님이 나를 한국일보로 데리고 가서 소개해 주셨어요. 강소천 선생님은 나를 친조카처럼 사랑해 주셨고 동화작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원수, 박홍근 선생님은 거의 매일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문학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동요 ‘고행의 봄’, ‘오빠 생각’, ‘나뭇잎 배’를 안주처럼 하모니카로 연주하곤 했었는데, 아주 좋아하졌지요. (그분들 곡이여서요. 오빠생각은 이원수 사모님이신 최순애 선생님 곡인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여서 감정이 솔솔 묻어났지요. 하하……)

선생님은 대학 재학 중인 1961년에 동화 <인형이 가져온 편지>로 등단하셨잖아요? 이준연 선생님 하면 이 동화를 떠올리는 이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동화의 모델을 보여주셨다고 생각되는데 그 작품이 빚어지고, 발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서라벌 예대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논둑, 밭둑에 앉아 동화를 구상하고 들일이 없는 비오는 날이면 동화를 썼어요. ‘열심히, 많이 써 놓으면 언젠가는 햇빛 나는 날이 있을 거다’라고 꿈꾸면서요.

 어느 날, 쓰레기통 앞에 버려진 절름발이 인형을 주워들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인형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동화를 쓴 뒤 친구들한테 보여주었더니 재밌고 좋다며 신춘문예에 응모해 보라고 권유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일보에 응모했고 당선이 되었어요.

그 후 아주 극도로 나쁜 시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을 쓰셨잖아요? 다른 잡문은 안 쓰시고 동화작품만 쓰신 걸로 아는데, 이제까지 몇 편이나 쓰셨어요? 기억하세요? 혹시 메모한 자료를 가지고 계신지요?

- 저는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날짜와 매수, 발표지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단편과 장편을 합하여 700 편 가량 됩니다.

저희는 가끔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준연 선생님의 시력이 우리네와 똑같았다면 아마 그 분은 저리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요. 기자나 교사 등 다른 직업을 갖게 됐을 거라 동화 작품에만 몰두했겠느냐고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 말씀드렸지만 밝은 눈을 가졌다면 기자나 교사, 작곡가 등 좀 더 활동적인 일을 했을 겁니다. 나를 동화 작가로 만들어준 내 눈을 나는 사랑하고 고마워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더욱 더요. 후후…….

그 많은 작품 중에서도 애착이 유난히 가는 작품들이 있지요? 그런 게 어떤 작품입니까?

- 나를 동화작가로 만들어 준 동화 ‘인형이 가져 온 편지’, ‘지워지지 않는 일기’와 ‘도깨비가 된 허수아비’, 장편 소년소설 ‘철새들의 고향’ 입니다. 내 동화나무의 씨앗이자 단비였어요.

선생님은 등단 이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 왕성한 활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요즘만 빼놓고는요. 그 결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남보다 많은 작품이 수록된 걸로 아는데 어떤 작품들이 있나요?

- 1985년 ‘바람을 파는 소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4-1학기)

1993년 ‘보리바람’ (초등, 국어 읽기, 6-2)

1996년  ‘거꾸로 나라 임금님’ (초등, 국어 읽기, 3-1)

2000년 ‘매미 합창단’ (초등, 국어 읽기, 2-1)

2000년 ‘풍년 고드름’ (초등, 국어 읽기, 2-2)

2001년 ‘바람을 파는 소년’ (중학교 국어 1-1)

1980년 10월 원작  ‘철새들의 고향’ 을 영화로 제작 (‘달려라 만석아’, 태창흥업 제작)

선생님은 2남 2녀를 두셨잖아요? 그런 선생님 가정이 우리나라의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세요? 그게 뭔지 맞춰보세요?

- 삼 부녀 동화작가라는 것이지요? 은경, 은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작품의 첫 번째 독자이자 친구, 도우미, 운전기사 등 많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제법 괜찮은 술친구들이에요. 은경과 은하가 없었다면 나는 50년 동안 한결같이 동화를 쓸 수 없었을 겁니다.

“은경아, 은하야! 고맙다, 고마워! 너희들은 내가 동화나라로 가는 길에 등불이 되어 주었어!”

이제까지 우리나라 아동문학 문단사상 삼부녀가 아동문학가인 집은 없거든요. 모녀나 부녀가 작가인 집은 더러 있지만요. 딸들이 다 아버지의 뒤를 따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삼부녀가 아동문학을 한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평과 조언을 해줄 수 있어 즐겁기도 하지만, 두 딸이 어린이와 동화를 사랑하고, 동화작가라는 직업을 숭고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내게는 더 의미가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작가, 순수한 작가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전북과학대학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는 큰딸 이은경의 문학에 대해서 아버지로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 큰딸 은경이는 전공이 유아교육이라서 그런지 특히 유아동화 부문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아들의 발달적 흐름이나 심리적 특성을 잘 꼬집어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유아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여 재미있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어른들에게 유아들도 인격적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어른들이 배려해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동화집보다는 유아그림책 시리즈를 더 많이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유아교육심리학을 연구하면서 그 이론을 직접 작품으로 연계하여 유아교육전문가와 동화작가의 장점을 조화롭게 살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전 한남대학교 문창과 교수인 작은딸 이은하의 작품세계는요?

- 작은딸 은하는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을 전공해서 그런지 장편 소년소설을 통해 주제의식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느끼는 은하의 작품세계는 어둡고 소외된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첨예하게 다루면서 개성과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통을 사실성과 환상성을 적절히 사용하여 재미와 감동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비판적 시선을 가진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을 잘 만들어내는데, 순수하면서도 자아가 강한, 끈질긴 근성의 주인공들은 자신과 가족, 사회를 인식하는 모습이 남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독자로서 장편동화 <바람 부는 날에도 별은 떠 있다>라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초고를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인물과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많은 고민을 하고, 문학에 대한 진정성이 엿보여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소년소설도 많이 쓰셨지만 <인형이 가져온 편지>, <하루나라 하루왕>, <도깨비가 된 허수아비>, <거꾸로 나라 임금님>, <까치를 기다리는 감나무>, <밤에 온 눈사람> 등 순수 동화를 많이 쓰셔서 동화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신 공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서점에 나가보면 작가만 달랐지 비슷비슷한 소재로 쓴 생활동화가 참 많거든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어린이와 동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문학성이 없는 장난감 같은 동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동화를 가볍고 쉽게 생각하는 점, 어린이를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점, 동화작가를 돈과 유명세를 위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점 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잘 팔리는 작품만 선호하는 출판사와 독자의식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그런지 아동문학 행사에 잘 안 나오시는데, 아동문학 단체에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그리고 아동문학을 하는 후배들에게 하실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 후배들이 잘 하고 있는데, 참석도 않는 회원이 무슨 말을 합니까? 후후…….

앞으로 선생님의 창작 계획을 들려주시죠?

-2011년은 ‘이준연 동화문학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신작들로 새 동화집 한 권을 내려고 하는데 꿈이 이루어질는지 모르겠어요…….

장시간 고맙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후배들을 위해 하모니카 한 곡 불어 주시죠. 저희도 선생님과 신나게 어울리던 광화문의 선술집 옛 추억에 빠져 보렵니다.

- 밤새도록 불어줄 테니 다 같이 건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수성찬으로 음식을 대접해 주신 사모님. 행여 술이라도 모자랄까 냉장고에서 쉼 없이 맥주를 내오는 따님들. 흥에 겨워 연신 하모니카를 연주 하시는 선생님. 그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낭만파 후배들! 입도, 귀도, 마음도 즐거운 이런 날이 또 있을까! 깨끗한 하모니카 연주처럼 선생님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몇 시간, 우리의 영혼이 샘물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   <열린아동문학. 200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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