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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똥 한 덩이 ( 공광규 )

좋은시& 시집

by 순한 잎 2008. 12. 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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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똥 한 덩이 - 공광규 시집, 실천문학의 시집 179

 

 

 

말똥 한 덩이

 

 

『소주병』을 펴낸 공광규 시인의 새 시집 『말똥 한 덩이』가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 22년, 여섯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눈길이 가닿은 것은 도심 속 사물들이다. 시래기 한 움큼, 관광마차를 끄는 말의 말똥 한 덩이, 주택 담장의 덩굴장미 등 시인의 눈을 통해 본 도시의 소박한 단면들은 우리에게 늙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동심을 닮은 활기 넘치는 자연을, 빛나는 과일의 몸처럼 청량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1부에는 도시 소시민의 얼굴들에 비친 비애를 노래한 시들을 담았다.

2부에서 시인은 도심 속 사물과 기억 속의 자연물을 통해 과거와 접속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3부는 비둘기, 까치, 달팽이, 목련·모과·감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홀어머니, 산비둘기로 환생한 동생,

동네 어귀에 개복숭아꽃으로 핀 누이의 마을 등을 노래한다.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우현(雨絃)환상곡

 

빗줄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현이어서

나뭇잎은 수만 개 건반이어서

바람은 손이 안 보이는 연주가여서

간판을 단 건물도 고양이도 웅크려 귀를 세웠는데

가끔 천공을 헤매며 흙 입술로 부는 휘파람 소리

 

화초들은 몸이 젖어서 아무 데나 쓰러지고

수목들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비바람을 종교처럼 모시며 휘어지는데

오늘은 나도 종교 같은 분에게 젖어 있는데

이 몸에 우주가 헌정하는 우현환상곡.

 

 

압록 저녁

 

강바닥에서 솟은 바위들이 오리처럼 떠서

황홀한 물별을 주워 먹는 저녁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 강도 저와 닮아

속마음과 겉 표정이 따로 노나 봅니다

 

강심은 대밭이 휜 쪽으로 흐르는 것이 분명한데

수면은 갈대가 휜 쪽으로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대밭을 파랗게 적신 강물이 저녁 물별을 퍼 올려

감나무에 빨간 감을 전등처럼 매다는 압록

 

보성강이 섬진강 옆구리에 몸을 합치듯

그대와 몸을 합치러 가출해야겠습니다.

 

 

놀란강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 억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말똥 한 덩이

 

청계천 관광마차를 끄는 말이

광교 위에 똥 한 덩이를 퍽! 싸놓았다

인도에 박아놓은 화강암 틈으로

말똥이 퍼져 멀리멀리 뻗어가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잘게 부순 풀잎 조각들

풀잎이 살아나 퇴계로 종로로 뻗어가고

무교동 인사동 대학로를 덮어간다

건물 풀잎이 고층으로 자라고

자동차 딱정벌레가 떼 지어 다닌다

전철 지렁이가 땅속을 헤집고 다니고

사람 애벌레가 먹이를 찾아 고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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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들이 많이 들어있는 시집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느님도 자신이 빚어놓은 세상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은 부족하기에

아마 이 세상에 시인을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살아나는 시속의 의미도 맛있지만

공광규 시인이 빚어낸 시어들도 빛을 내는군요.

우현환상곡, 몸관악기, 얼굴반찬, 무량사...

오랜 시간동안 밤잠을 설치며 '몸울음'으로 빚어냈을 아름다운 시들이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시집 권하는 사회'가 와서 시인들이 잘 사는 사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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