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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고영민)

좋은시& 시집

by 순한 잎 2009. 1. 29.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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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시집 <악어>-실천문학사

 

 

즐거운 소음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겨울 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 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너와 동침을 한다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히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 고영민 시인의 시집 <악어>... 재밌습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는다는 발상, 버스 옆좌석에 앉은 여인과의 동침을

운주사 천년와불에 빚댄 시인의 상상력이 재밌으면서 의미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밖에도 좋은 시가 많습니다. 시골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주말연속극'과 '산등성이'시도 이곳에 적고 싶었지만 길어서 생략합니다.

마치 전원일기 드라마를 보는 듯 따뜻하며 잔잔한 감동이 있습니다.

몇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노부부의 모습이 재밌고 흐믓하여 미소 짓게 만드네요.

시집 한 권에 6천원. 고작 6천원에 저는 이 시집을 보고 또 보고, 여러 번 봅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DVD는 삼일 늦게 갖다줬더니 천오백원 이자가 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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