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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집 <밀물의 시간>

좋은시& 시집

by 순한 잎 2015. 3. 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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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로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ㅡ도종환 「밀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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