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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즐거운 책읽기

by 순한 잎 2013. 10. 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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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로버트 A. 존슨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너무나 훌륭하고 인상 깊은 책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히며! 

하여, 책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다.

 

이 책은 12세기 신화인 어부왕과 파르시팔에 관한 ‘성배 신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 내면의 남성성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텍스트로 사용된 성배 신화는 가장 초기의 기록인 크레디앙 드 트로이가 쓴 시 형식의 프랑스어 판본을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성배 신화를 통해 여기서 말하는 남성성이란 결코 힘을 뽐내며 마초적인 남성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다.

 

성배의 성에 살고 있는 어부왕은 연어를 먹다가 데여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자는 순수한 파르시팔이다. 파르시팔이 어부왕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얻어낸 답은 곧 성배의 성을 향해 떠나 ‘성배’를 찾는 일이다. 이 여정 속에서 성배 신화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데, 파르시팔이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 동기는 결국 어부왕의 상처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불어에서 ‘상처’와 ‘은총’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세에 ‘고통이 곧 구원의 지름길’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신화 속, ‘어부왕의 상처’와, ‘파르시팔의 여정’, 그리고 ‘성배’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 세 가지 의미를 알면 이 책에서 말하는 남성성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부왕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면, 사춘기로 접어든 어부왕은 숲에서 무예 수업을 하던 중 배가 고파 누군가 불을 피워 구워놓은 연어를 맨 손으로 조금 뜯어 먹다가 너무 뜨거워 땅에 떨어뜨린다.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손가락을 입에 넣은 순간 손가락에 붙어있던 연어조각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상처를 입는다.

 

어부왕의 상처란, 곧 어린 시절 경험하는 충격이다. 이 충격이란 것은, 소년 시절 경험하는 강렬한 비전이며 환희이며, 장엄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sprit)과 만나는 순간으로, 이것은 성장기에 막 들어선 소년이 자기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적인 특질 중 어떤 것을 접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영으로부터 받은 비전이 자신과 충돌했을 때 인류 전체에 대단히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충돌로 인해 ‘최상의 진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치명적인 갈등상황’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년들은 모두 어부왕의 상처를 입는다. 이런 상처 없이는 의식적인 진화도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 상처를 행복한 추락, 또는 다행스런 실수(felix culpa)라고 표현되는데 결국 이 상처가 그 사람을 구원의 과정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즉 이때부터 에덴동산과도 같은 순진한 의식과는 결별하고 자의식의 발달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후 진화의 단계로 접어드는데 어린 시절은 ‘무의식 상태의 완전함’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무의식적 완전함은 중년기에 이르러 ‘의식적 불완전’으로 발달하고 그 다음은 ‘깨달음’에 이르는데 이때는 ‘외부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의식적으로 화해하면서 조화로운 온전함’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어쨌든 상처 입은 어부왕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성배의 성에서 자신을 치유할 방법은 조용히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순진한 바보(파르시팔)를 찾는 일이었고 파르시팔은 치유를 위해 성배를 찾는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예언에 의하면 궁정에 진짜 바보가 등장하여 특정한 질문을 하는 순간, 어부왕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우리 내면의 심한 상처를 치유하는 비밀은, 결국 가장 순수한 부분이며,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의 나이와 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이야기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배의 성에 살고 있는 어부왕이 상처입음 - 치유하는 자는 곧, 어부왕 내면의 바보 파르시팔- 파르시팔의 긴 여정은 성배의 성을 찾는 일.

 

이번엔 파르시팔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파르시팔은 웨일즈 지방에서 태어난 천민으로 처음엔 이름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단다. 치유자의 역할이 예고되어 있고, 한자어로는 도(道)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사춘기에 들어선 파르시팔은 어느 날 밖에서 놀다가 근사하게 차려입고 말을 탄 기사 다섯 명과 마주친다. 그 뒤로 집을 떠나 기사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파르시팔은 여러 적기사들과 싸우는데 매번 적기사를 굴복시켜 아더왕 앞으로 보내고 나날이 명성이 높아만 간다. 아더왕은 이런 파르시팔을 찾아오게 하고 마침내 파르시팔을 위한 궁정 축제가 열린다.

이때 추녀가 나타나 파르시팔이 저지른 죄와 멍청함을 폭로한다. 그 중 제일 큰 실수는 성배의 성에서 제대로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그 질문은 ‘성배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어야 했는데 파르시팔은 결국 그 질문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로부터 어디 가든 너무 많은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들었기 때문이다.(이것은 어머니콤플렉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이 어머니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15-16세가 되면 우연히 성배의 성에 발을 들여놓게 되며 그곳에서 앞으로의 비전을 얻는다. 그러나 파르시팔처럼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성에 들어간 나머지 분위기에 압도 되어 다음 날 아침 똑같이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성의 삶에서 16세와 41세(최근 저자의 강의에선 49세)라는 나이에 가장 쉽게 성배를 발견하게 된단다. 16세와 41세 사이에는 20여년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파르시팔도 이십여 년간의 긴 여정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배의 성을 만난 경우 그 체험이 너무 강렬해서 아주 무기력해져 버리기도 한다. 삶에 어떤 동기나 목표도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 중에는 자신이 본 성배의 성으로 인해 반쯤 눈이 먼 경우도 있다.)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배를 경험한다. 여성은 결코 성배의 성을 떠나지 않는다. 여성에게는 남성이 가지지 못한 우주가 있고 이 우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되었음을 느낀다. 이 곳에서 여성은 마치 집과 같은 편안함을 체험한다. 남성은 끝없이 노력을 요하는 긴 여정을 떠나 바깥에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 반면 여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파르시팔은 기사의 모험을 떠나지만 그의 여인 블랑시 플레르는 성에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이제는 젊을 때 그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고독들 즐긴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배의 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어쨌든 이 추녀의 등장으로 인해 파르시팔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드디어 성배의 성을 찾아 다시 두 번째 길을 나선다.

여기서 '추녀'가 의미하는 것은 중년들이 흔히 겪는 성공 앞에 나타나는 삶의 무의미함과 절망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추녀의 등장으로 인해 절망이 바로 진화의 기회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배란 무엇인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면의 실체요, 비전이며, 신비한 체험이고, 시다.

바깥세계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서 성배를 추구하면 결국 찾아 헤매던 사람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실망과 좌절만 남긴 채 끝이 난다. 우리의 기대가 뭐든 진실은 성배가 항상 우리 손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배는 밖에서 찾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성배를 가리고 있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냄으로써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중세 그리스도인의 속담중에 “하느님을 찾는 행위는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다”와 같이 하느님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의미가 같다.

 

성배를 찾아 나선 파르시팔은  마침내 순례자를 따라 가다가 은둔자를 만나게 된다.

 

(은둔자는 고귀한 인물이다. 이런 내향적인 영혼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인류에게 봉사 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저장한다. 이들은 대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산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천재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날이 온다.)

저자는 은둔자적 기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부디 자기 내면의 운둔자적 기질에도 또 주변 운둔자들에게도 친절하시길. 자기 자녀가 타고난 은둔자라면 자녀에게 적기사의 경험을 강요하지 말고 스스로 숲속의 길을 찾도록 내버려 두라.)

 

이 은둔자는 투시안으로 파르시팔의 모든 일들을 다 알아채며 성배의 성에서 치유의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을 꾸짖는다.

그리고 성배의 성을 가는 길을 알려준다. 은둔자가 가르쳐준 성배의 성은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크레띠앙이 지은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그렇다면 이 성배 이야기에서 문제가 된 ‘성배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답은 “성배는 성배왕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라 부르는, 혹은 융이 참 나(the self)라 부르는, 우리가 우리의 자아을 넘어선 더 큰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수많은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그 존재를 위해 성배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쉬운 표현으로 풀이하자면, 융이 말한 ‘일생이란 '자아'에서 '참 나'로 심리의 구심점을 옮겨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융은 이 과정을, 인간이 일생토록 해야 할 과업이자 또 인간이 하는 모든 노력의 중심에 존재하는 의미로 보았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신 혹은 성배를 섬기는 것이다. 성배 탐색은 결국 신을 섬기는 일이다.

우리가 이 진실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가 개인의 행복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린다면

잡기 어려운 성배가 우리 손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선불교의 ‘십우도’에서도 동일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개울물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라. 시들어도 아무도 모르고, 꽃들은 선명하게 붉은데-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말은 자연스러움과 또 자연의 창의성과 자발성이 저절로 일어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자기실현의 살아있는

실체이며, 자연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참 나’의 창의적인 욕구다.

정신의 구심점을 자기 외부의 더 큰 어떤 것으로 이동시키다 보면 행복은 저절로 주어진다.

 

성배 신화는 영적 여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같고, 일평생 도를 구하러 길을 떠나는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의 삶 자체를 ‘궁극적 진리를 향한 깨달음’ 내지는 ‘자기 발견을 위한 탐색의 여정’으로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남성성 He 를 붙인 것의 의미를 새겨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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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보

 

제 1장 어부왕
사춘기에 들어선 왕이 뜨거운 물고기를 삼키려다 입 안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로써 아픔으로 신음하는 어부왕이 탄생하는데, 현대인은 모두 이 어부왕과 같은 병고를 앓고 있다. 어부왕처럼 성장기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물고기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적인 특질을 맛보지만 이는 삼키기엔 너무 뜨겁고 잊기엔 너무 강렬해 깊은 상처로 남는다.

제 2장 파르시팔
순수함과 어리석음의 대명사 파르시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 제도적 교육이나 적절한 훈육의 기회 없이 자라났지만, 놀랍게도 그는 어부왕의 상처를 치유할 열쇠를 He가 쥐고 있다. 이 순진한 청년이 우연히 만난 다섯 기사의 모습에 도취되어 어머니의 집을 떠난 뒤, 아더왕의 기사가 되고 모험과 시련으로 가득한 성배의 성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 3장 순결
성배를 추구하는 기사는 결코 여성을 유혹해서도, 여성에게 유혹을 당해서도 안된다. 여기서 여성은 내면의 여성을 의미한다. 남성이 내면의 여성과 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그녀는 그를 지켜주고, 영감을 주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내면의 여성의 꼬임에 빠지면 무드에 사로잡혀 객관적인 세계와 유리된다. 순결이란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원리이다.?

제 4장 성배의 성
성배의 성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이 성은 비전이며 내면의 실체이고, 또 한편의 웅장하고 장엄한 시다. 파르시팔은 사춘기시절 우연히 성배의 성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만 이 성에 머물 수는 없다. 의식적 성숙이 이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한번의 경험이 너무나 강렬해 그로부터 20년간 이 성을 다시 찾으려는 기나긴 여정을 계속한다.??

제 5장 건기
잃어버린 성배의 성을 찾으려고 장도에 오르면서 드디어 그는 파르시팔이란 이름을 갖는다. 그 이전까지 파르시팔에게는 정체성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 단계의 진화는 완벽이 아니라 완성이나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삶의 어두운 면과의 통합이 요청된다.

제 6장 추녀
최고의 기사인 파르시팔을 치하하기 위해 아더왕의 성에서 성대한 잔치가 거행된다. 이때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혐오스러운 추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파르시팔의 영웅담 뒤에 가려진 어두운 측면을 낱낱이 폭로한다. 남성이 성공의 절정을 이루었을 때 흔히 추녀가 등장하는데, 추녀는 삶의 열패감이나 무의미함을 던져준다. 추녀의 등장을 받아들이거나 맞이하기는 쉽지 않지만, 남성이 개별화를 수행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존재이다.

제 7장 성배를 향한 기나긴 여정
사춘기 시절 짧은 순간 성배의 성을 경험한 후 그 장엄하며 신비로운 성을 되찾기 위한 20년의 기나긴 여정 끝에 파르시팔은 마침내 그 성에 도달한다. “성배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됨으로써 어부왕의 상처가 치유된다. 12세기 파르시팔이 던진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용한데, “삶의 구심점, 즉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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