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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좋은시& 시집

by 순한 잎 2013. 9. 2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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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 창비시선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별 닦는 나무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사철나무 아래 저녁

 

 

사철나무 꽃잎이 마당에 우박으로 쏟아지는

오래된 뜰과 대숲이 깊은 성북동 수연산방이다

 

마루에 누워 있는 주름 가득한 늙은 다탁을

저녁 햇살이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솟을대문 앞 수국은 당신 얼굴로 환하고

화단에는 금낭화가 주렁주렁 팔찌를 걸어놓았다

 

송판 덮개를 씌어놓은 옛 우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지 등 눈을 가진 당신과

 

허물어진 성곽 긴 그늘을 지나오면서

당신에게 나를 허문 게 언제였던가를 생각했다

 

해거름이 어둑어둑 수묵으로 번져가는 산방

초저녁 전등 아래 담채로 물든 환한 당신

 

섬돌에 앉아 있는 다정한 구두 두켤레에

사철나무가 점 점 점 꽃잎 자수를 놓고 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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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시인의 시집, <담장을 허물다>

등단 27년 만에 내는 여섯 번째 시집이랍니다.

시인이 말하길, 이것이 본인의 시쓰기 속도라고 하네요.

하지만 느리기에 정제된 시들이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집 발간을 축하드리며,

시집 뒷면의 이재무 시인의 추천글처럼

'그는 타고난 시의 농사꾼이고,

그의 전답에서 소출된 시의 알곡들은 쭉정이가 하나도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

등단 27년이라는 연륜만큼 시의 깊은 맛을 독자에게 선사해준

공광규 선배님의 시집이 반갑기만 합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 참 겸손한 분이며,

시의 열정이 몸 안에 가득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시집을 내밀며, 

'별거 없다. 읽어보고 별로면 시집 내다버려라.' 고 말씀하셨는데...ㅎㅎ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참 아름다운 시집.

고이고이 오래 간직하고픈 시집' 이라는 결론입니다.

 

이 가을에 널리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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