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좋다, 참좋다! 하며 읽는 시집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공손한 손
고영민/ 창비
공손한 손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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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등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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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목
봄날, 청둥오리들이
물 홑청을 펼쳐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잔잔히 펼쳐놓은 원단을
자맥질하여
일정한 땀수로 꼼꼼히
박음질을 하고 있다
겨우내 덮고 있던 너희들의 낡고 큰 이불
제법 큰 놈은 한번에 두 땀, 석 땀씩
꿰매고 있다
꼼꼼하여
바늘땀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헐겁던 수면이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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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 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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