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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한 손>/고영민

좋은시& 시집

by 순한 잎 2013. 8. 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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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다, 참좋다! 하며 읽는 시집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공손한 손

고영민/ 창비

 

 

 

공손한 손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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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등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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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목

 

봄날, 청둥오리들이

물 홑청을 펼쳐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잔잔히 펼쳐놓은 원단을

자맥질하여

일정한 땀수로 꼼꼼히

박음질을 하고 있다

겨우내 덮고 있던 너희들의 낡고 큰 이불

 

제법 큰 놈은 한번에 두 땀, 석 땀씩

꿰매고 있다

 

꼼꼼하여

바늘땀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헐겁던 수면이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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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 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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