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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2일차 /우수리스크 투어

나의 여행 추억

by 순한 잎 2019. 8. 3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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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방에서 본 마을의 작은 교회 (호텔은 코로나호텔이었는데 썩 좋진 않았지만 이곳 호텔이 다 그렇다)  



 

호텔 조식.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커피는 딱 한 잔만 준다. 더 먹고 싶어도 못먹는다.


 

 

 

우수리스크 역사 탐방 시작





 

 

 

 

 

 

 

 

 

 

 

 

 

 

 

항일투쟁 역사탐방 ㅡ 연해주 항일운동의 역사 현장.

최재형 고택. 이상설 유허비 . 안중근기념비. 발해성터 . 고려인문화센터





블라디보스토크가 속해있는 프리모르스키 주는 우리말로 '연해주' 로 불린다.

연해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863년 함경도의 13개 농가가 이곳으로 처음 이주를 했고 애국지사들의 망명이 이곳으로 이어져

1910년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항일 임시정부의 토대가 된 전로한족 중앙총회가 이곳에서 결성된 것이다.

이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이었던 최재형 독립운동가 및 이상설 선생 등의 흔작이 남아있다.


최초 전로한족 중앙총회 -- 1917년 5월 러시아 전 지역의 고려인 대표 100명이 모여 전로한족 대표회의를 열고 민족의 자치와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로한족 중앙총회를 조직하였고, 1919년 3월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상해와 한성의 임시정부보다 앞선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최재형 선생은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했던 분으로 연해주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전로한족 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의병대를 정비하고 항일사상 고취를 위해

한인학교를 설립하는 등 언론 투쟁에도 앞장섰다.

함경도에서 노비와 기생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9세 때인 1869년에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12세 때 가출하여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를 만나 양자처럼 자라면서 러시아를 배우는 등 교육을 받고 러시아 문물을 배우고 익히며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 뒤 러시아로 이주한 동포들의 입장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며 도로 공사에 한인들이 일을 할수있도록 중간에 역할을 해주면서

러시아 정부의 신임도 얻게 되었고, 그 뒤 거부가 되었다. 부를 혼자 누리고 산 게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뒤에서 자금을 대주는 등 큰 일을 한 분이다.


이상설 선생도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로 우수리스크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간도 용정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1907년 헤이그 만국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자신의 유해를 수위푼강에 뿌려달라고 유언 했으며 1917년에 서거하였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겨우 연해주에 터를 잡고 살고있던 한인들은 이유도 모른채 라즈돌노예 기차역에 집합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우수리스크에는 인구의  10프로 정도가 고려인들로써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 

고려인문화센터  앞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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