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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불교 최초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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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한 잎 2015. 4. 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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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비구니(比丘尼)

 

539년 신라 법흥왕 따라 출가한 왕비 묘법<妙法>

 

명종5년(1550) 이자실이 그린 ‘관음삼십이응신도’의 부분도. 비구니 스님이 합장하고 앉은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바닷길을 헤치고 일본에 도착한 혜편(惠便)은 낯선 일본 땅에서 고구려에서 온 비구니 법명(法明)을 만나 서로 전법에 대한 뜻이 같음을 확인했다. 곧 의기투합한 둘은 함께 법을 전하며 이곳 저곳을 유행했고, 한 곳에서 자신들의 설법을 듣고 발심한 세 여성으로부터 출가 요청을 받게 됐다.


그러나 출가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단이 성립되지 않은 일본 땅에서는 삭발염의를 하는 득도만 가능할 뿐 수계는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당장은 이들의 출가를 받아들여 득도를 시키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비구니 법명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교육을 하도록 했다.

 

처음으로 불교를 공식 수용한 고구려에 비구는 물론 비구니가 있어 그 활동이 적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일본에 남아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첫 출가자인 동시에 최초의 일본 비구니가 된 선신(善信), 선장(禪藏), 혜선(惠善)을 득도시킨 사람이 고구려 고승 혜편이었고,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친 이가 다름 아닌 고구려 노비구니 법명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에 분명하게 비구니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고구려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법명을 언급한 대목이 전부라고 할만큼 미약하지만 백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보다 구체적이다. 「일본서기」에는 숭준천황(崇峻天皇) 즉위전(卽位前, 587) 6월 갑자(甲子, 21일)에 선신니(善信尼) 등이 관리에게 “출가의 길은 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므로 백제에 가서 수계법을 배울 수 있게 하소서”라고 청원하는 대목이 있다. 이같은 기록은 「원흥사연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결국 고구려 승려 혜편에게 득도하고, 고구려 비구니 법명으로부터 불법을 익힌 세 여성은 일본의 현실을 감안해 백제에 가서 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한 비구니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는 지방 관리에게 청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방 관리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온 백제 사신에게 백제의 출가제도에 대해 물었고, 백제에서 온 사신은 백제의 수계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간 사신은 비구니의 수계의식을 묻는 일본 관리에게 “니사(尼寺) 안에서 10명의 니사(尼師)를 청해 비구니 본계를 받고, 곧 법사사(法師寺)로 가서 10명의 법사(法師)를 청해 앞서의 니사 10명과 합친 20명의 스승으로부터 본계를 받는다”고 수계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법사사(法師寺)와 니사(尼寺)의 거리는 종소리가 서로 잘 들려야 하는 사이며, 보름마다 한 낮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곳에 절을 짓는다”고 비구사찰과 비구니사찰의 위치까지 구체적으로 일러주었다.

 

日 문헌에 고구려·백제 尼 기록

이어 이들 일본문헌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경론과 율사 등 6인의 불교인을 일본에 보냈고, 이 가운데 비구니가 하나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588년에 선신니 등이 백제에 와서 백제의 비구니로부터 육법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이렇게 백제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은 선신, 선장, 혜선 등이 바로 일본 최초의 비구니이자, 일본 최초의 승려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구니가 존재했던 것은 물론 그 역할 또한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이 기록이 정작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나, 이렇게 라도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에 비구니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비구니 역사는 현재 전해지는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최초의 비구니가 누구였는지도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에서는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이미 그 이전에 타국의 전법 포교승들이 암암리에 들어와 포교의 싹을 틔웠다. 그 지역이 일선군이었고, 모례의 집은 비밀스러운 포교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모례는 만약 들킬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아도를 숨기며 불교를 전할 수 있도록 했고, 아도는 우연한 계기에 신분을 속인 채 공주의 병을 치료하면서 미추왕의 신임을 받아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다.

 

아도가 작은 사찰을 세우자 모례의 누이동생 사(史)씨가 아도에게 귀의해 비구니가 되었고, 삼천기(三川岐)에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불법 전파에 나섰다. 이 사씨가 곧 신라 최초의 비구니이자 문헌에 등장하는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사씨가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신라에서 계를 줄 스승이 없어 구족계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미니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최초의 비구니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시대적으로도 실존 여부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게 보편적 시각이다. 즉 여기서의 아도가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와 동일 인물로 묘사되는 점이나 미추왕 때 왔다는 내용 자체가 상식선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래승들의 전설을 묶어서 신라적인 설화를 집대성해 아도라는 성자상을 확립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실제 기록상 하자가 없는 최초의 비구니는 누구일까.
그는 바로 신라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비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고 그 대가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불법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널리 홍포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왕도에 흥륜사를 세웠으며 말년에는 직접 왕관을 벗고 가사를 입어 비구가 되었다. 그리고 법흥왕의 비는 흥륜사 맞은 편에 영흥사를 세우고 함께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으며,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했다. 이에 따라 흥륜사와 영흥사는 신라에서 최초의 법사사와 니사가 되었고, 묘법은 공식적으로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이 부분을 “절 짓는 공사가 완성되자 법흥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스님이 되어 법공(法空)이라 이름을 바꾸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랐다.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 했다. 왕비 또한 불법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주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이 대목을 “법흥왕이 이미 폐허가 된 절을 일으켰는데 절이 이루어지자 면류관을 버리고 가사를 입었으며(…) 처음 절 짓는 공사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 또한 영흥사를 세웠으며, 사 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법흥왕과 같이 출가해 비구니가 되고 법명을 묘법이라 하였다.

 

기록 첫 등장은 모례 동생 사(史)

역시 영흥사에 살다가 여러 해 만에 세상을 마쳤다”고 기록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법흥왕이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하고 삭발염의한 때는 대략 539년이다. 법흥왕비 묘법 역시 모례의 누이동생 사(史)씨의 예에서와 같이 구족계를 받은 사실관계를 증명할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해가 527년이고, 흥륜사와 영흥사를 짓기 시작한 때가 535년이었기 때문에 그사이 8년 동안 충분히 여건을 갖췄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이 때의 계사는 고구려나 백제 등지에서 초빙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꼭 10명의 계사가 아니라 그보다 적은 수의 계사로 형식을 갖춰 수계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따라서 법흥왕비 묘법을 문헌상 나타나는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이후로도 왕비와 귀족 집안의 여인네들이 출가해 비구니가 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진흥왕조’에서는 “왕은 어려서 즉위해 일심으로 불법을 받들었다.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불렀다. 왕비 또한 따라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진평왕조’에서는 “영흥사의 소조불상(塑造佛像)이 저절로 부서졌는데 오래지 않아 진흥왕비였던 비구니가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진흥왕비는 사도(思刀)부인이었고, ‘진흥왕비였던 비구니가 죽었다’고 한 때는 진평왕 36년(614) 2월이었다.

 

따라서 법흥왕과 진흥왕이 대를 이어 출가했고, 왕비들 역시 대를 이어 비구니가 되었으며 영흥사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신라시대 왕비들의 출가 관련 기록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신라 진평왕과 문무왕 시대에 권력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유신의 부인(지소 부인)이 출가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열전』에 나타난다. 여기서는 “지소(智炤)부인은 태종 대왕의 셋째 딸이다.(…) 나중에 지소 부인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비구니가 되었다”고 김유신 부인의 출가 소식을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처 지소부인도 출가

이어 진평왕 때 비구니 지혜(智惠)가 선도산신모(仙桃山神母)의 도움으로 자신이 머물던 안흥사의 법당을 새로 개수하였으며, 해마다 봄·가을로 선남선녀들을 모아 10일간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문왕 때는 국사였던 경흥 대덕이 삼랑사에 주석 할 때 갑자기 기운을 잃고 눕자 어느날 한 비구니가 와서 병문안을 하고는 위로의 말을 하며 열 한가지 얼굴 모양을 지어 웃게 함으로써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비구니로는 828년 향조사(香照師)와 함께 재산을 희사해 탑을 세운 원적(圓寂)에 대한 기록이 있고, 통일 이전 원광의 점찰보에 시주한 비구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는 곧 비구니들에게 재산소유가 인정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서기」에 “지통원년(持統元年, 687) 4월에 신라의 승니(僧尼)와 남녀 백성 22명이 무장국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비구니 스님들이 해외에까지 나가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왕건 부인 중 대서원부인 자매가 고려 최초

신라는 점차 중국에서 계율을 공부하고 연구한 유학승들의 귀국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운 바를 근거로 독자적 교단을 형성해 갔다. 비구니 교단 역시도 이러한 신라불교 전반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라의 비구니 관련 기록 가운데 특이할 만한 내용은 바로 비구니 승직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국통(國統)은 1인인데,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혜량(惠亮) 법사(法師)로써 삼았다. 도유나랑(都維那娘) 1인인데, 아니(阿尼)로 삼았다. 대도유나(大都維那) 1인인데, 진흥왕이 보량(寶良) 법사(法師)로써 처음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도유나랑’이 바로 비구니의 승직이고, ‘아니’라는 비구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신라시대에 비구니 스님들을 총 관리하는 ‘도유나랑’이라는 직제가 있었고, ‘아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이 직제를 맡은 비구니 스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신라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이 적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비구니 교단이 형성돼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시대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이 적지 않았다고 해서 그 위풍당당함이 고려나 조선에서도 똑 같았던 것은 아니다. 불교의 흥망성쇄와 더불어 비구니 또한 질곡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신라엔 비구니 승직 ‘도유나랑’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 비구니에 대한 예우가 비구와 크게 차별이 없었다. 구체적 사례가 스님들을 궁중으로 초대해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 행사에 나타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충선왕이 즉위한 원년 9월에 왕이 수녕궁에서 승니(僧尼) 2200여 명에게 반승했고, 같은 해 10월 정해에도 수녕궁에서 승니에게 반승했다. 그리고 공민왕 18년 노국 공주의 기일 날에 연복사(演福寺)에서 불공할 때 참석한 승니 수천 명에게 포목 800필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실의 공식행사인 반승 행사와 불공에 비구니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옛 기록에 나타난 고려시대 최초의 비구니는 누구였을까.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부인 신혜 왕후 유씨가 태조가 풍덕군에 주둔할 때 하룻밤 섬긴 후 소식이 끊기자 정절을 지키려 출가했으나, 훗날 태조가 불러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상 고려 최초의 비구니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태조의 다른 부인들 가운데 자매지간인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과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이 태조를 하룻밤씩 섬긴 후 모두 비구니가 되었다. 이들은 이후 태조와 만났을 때 절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이에 왕건은 서경에 대서원과 소서원의 두 사찰을 지어 이들을 거처하게 했으며 토지와 농민을 예속시켰다. 따라서 이들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 두 사람이 기록에 나타난 고려 최초의 비구니가 되는 셈이다. 이후 비구니들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으나, 고려 초기 비구니들에 대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활동 내용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인물 중 하나가 김변의 처 허(許)씨(1255~1324)다. 그녀는 충숙왕 2년(1315) 61세의 나이로 출가해 성효(性曉)라는 법명을 얻었다. 성효는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통도사에서 사리를 얻고 계림을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장남의 집 옆인 남산에 초당을 짓고 살다가 입적했다. 10년간 비구니로 살다가 입적하자 나라에서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진혜대사(眞慧大師)라고 추증하기도 했다.

 

또 『고려사』132권에서는 밀직(密直) 허강(許綱)의 처 김(金)씨가 남편이 죽고 신돈이 결혼을 요구하자 “우리 주인이 평생 남의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 나를 욕보이려 한다면 자결하겠다”면서 출가한 기록이 있고, 가세가 빈곤해짐에 따라 생계유지를 위해 출가한 비구니들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는 김구(金坵)의 처 최(崔)씨(1227~1309)가 남편이 죽은 후 30여 년을 과부로 살면서 83세(1309)에 노환으로 죽기 하루 전에 출가해 향진(向眞)이라는 법명을 받은 대목이 있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임종이 임박해지자 묘련사 법주를 청해 계를 받아 출가하고 성공(省空)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합장한 채 오로지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서 죽어간 최서(崔瑞)의 처 박(朴)씨(1249~1318)와 관련한 내용도 있다.

 

특히 고려말에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열기도 뜨거웠다. 고려말 지공(指空), 나옹(懶翁), 보우(普愚) 등 당대를 대표했던 선사들의 비문에는 문도의 자격으로 비구와 함께 비구니가 따로 기록돼 있으며 그 수 또한 적지 않아 비구니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계진각국사어록』과 『한국불교전서』에는 종민(宗敏), 청원(淸遠), 요연(了然), 희원(希遠) 등의 비구니들이 강종 2년(1213)에 수선사 하안거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시 하안거를 마친 비구니들이 혜심 선사에게 법어를 청하자 일일이 화두를 제시하면서 참구하기를 권했다는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고려 묘총은 오도송 남기기도

또한 이색(李穡)이 지은 「엄곡기(嚴谷記)」에 따르면 나옹 화상이 비구니 화엄(華嚴)을 화두 수행에 참여시켰고, 무학이 화엄의 거처를 엄곡(嚴谷)이라 편액해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색이 지은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에서는 나옹의 제자 묘총(妙聰)이 수행 후에 오도송을 남겼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이를 근현대 대강백으로 존경받고 있는 운허 스님은 ‘묘청 비구니의 깨달은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이렇게 편역했다. “한 조각 외로운 배 아득한 바다에 떠/ 삿대 춤을 추니 딴 세상 풍류인 듯/ 구름 산 달빛 바다 모두 놓아 버리니/ 이 세상 모든 일이 한바탕 꿈이어라.”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열기가 비구 스님들 못지 않게 뜨거웠고, 그 중 깨달음의 세계에 들은 스님들까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 비구니 스님들의 역량은 적지 않았으며, 고려 후기 비구니 스님들의 이같은 모습은 신라 비구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과 태고 보우의 문도로 알려진 고려말 비구니들 중 정업원 주지인 묘봉과 묘장은 개경의 정업원을 주관하는 인물이었고, 공민왕비였다가 왕이 시해된 이후 출가한 혜비 이씨와 진비 염씨도 공식적인 출가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운경한 스님이 지은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와 『백운화상어록』을 간행할 당시 그 실질적 경비를 시주한 비구니 묘덕(妙德)도 고려시대 빼놓을 수 없는 비구니 중 한 명이다.

 

반대로 여성들의 출가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현종 8년(1071) 초 개인 주택을 절로 만들거나 부녀들이 여승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공민왕 8년(1359)에도 마음대로 승니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어 공민왕 10년(1361) 5월에는 어사대에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여성출가 금지를 주청하자 왕이 받아들였고, 창왕 1년(1388) 12월에도 전법판서 등이 “여승이 된 자는 실행한 것으로 논하고 감히 부인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한 죄를 가하며 향사와 역사, 공사의 노비는 승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라고 상소하는 등 고려 비구니 역사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 이성계의 딸이 처음으로 출가한다.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7년째 들어 세자책봉 문제로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성계의 비 강(姜)씨 소생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때, 이성계는 강씨 소생인 경순 공주에게 청룡사로 출가할 것을 권했다.

 

경순 공주는 청룡사에서 무학대사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함으로써 조선 개국 후 기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비구니가 된다. 한편 당시 청룡사에는 고려 공민왕의 비였던 혜빈 이(李)씨가 공민왕이 죽은 후 곧바로 출가해 주지로 있었으므로,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왕비와 공주가 나란히 비구니가 되어 함께 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때의 이 청룡사는 기록에서 정업원(淨業院)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업원은 고려 18대 의왕의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으며, 숭유억불로 대변되는 조선시대 비구니의 맥은 이 정업원으로 인해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역할이 컸다.

 

학자들은 정업원이 몇 차례에 걸쳐 철폐와 복원을 반복했고 중종 때 정업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성균관 유생들이 살도록 하면서 기록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궐내에는 정업원 외에도 비구니들이 머물던 사찰로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이 있었으나 이 역시 현종 때 완전히 철폐됨으로써 왕실과 사원을 연결해주는 매개 역할을 해왔던 비구니원이 모두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기존의 왕실 비구니원에 거주하던 비구니들을 중심으로 도성밖에 다시 비구니 사찰이 설립되었고, 이후로도 궐 안 여인네들과의 소통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이를 포함한 다른 이유까지 붙여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 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같은 승려 도성출입금지는 고종 32년 전면 허용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성계 딸 경순공주가 조선 최초

하지만 조선시대 중엽까지 한양 근교에만 모두 26개의 비구니 사원이 있었다.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는 한국비구니연구소에서 발간한 『비구니와 여성불교』에 실린 「정업원과 사승방의 역사로 본 한국의 비구니 승가」에서 “성종 6년(1475) 유신들의 상소에 따라 22개의 사찰이 폐쇄되고 청룡사, 청량사, 보문사, 미타사 등 4개 사찰만 남게 됐다”고 적고 있다. 이 네 사찰은 이후 사승방이라 불렸고 주로 왕족, 상궁나인, 사대부 부인들 가운데 출가하는 이들이 머물렀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상에 힘입어 새로운 전기를 맞은 불교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반인들의 보시가 늘어나면서 독자적인 불사가 가능해지기도 했다. 또한 이들 사승방은 조선 중기 이후 강원과 선방을 운영하며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과 교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된 비구니 승단의 역사는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요한 한 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숙종 27년(1701) 제작된 경북상주 남장사 감로탱화(사진 위)와 영조 35년(1759) 제작된 봉서암 감로탱화(사진 아래)에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 나정
글쓴이 : 나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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