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고려사의 재발견 / 전쟁과 민초(民草). 원나라 간섭기와 민초(民草)

자료실

by 순한 잎 2015. 4. 29. 16:43

본문

.

 

 

 

몽골군 포로 된 백성 한 해 20만 … 사망자는 그 이상

 

고려사의 재발견 전쟁과 민초(民草)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4년)에 실린 ‘김천이 어머니 몸값을 치르다’의 그림과 글. 그림은 포로(오른쪽 하단), 상봉(오른쪽 중단), 몸값 치르기(맨 위), 장례(왼쪽 중단)로 돼 있다.

 

 

1231년 1차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구주(龜州)성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 전투의 고려군 지휘자는 서북면[평안도]병마사 박서(朴犀)였다. 그는 한 달간 계속된 전투에서 몽골군의 구주성 점령을 저지해 영웅이 된다. 당시 생생한 전투 장면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몽골군이 쇠가죽으로 감싼 사다리 수레 속에 군사를 감춰 성 밑으로 접근해 굴을 판 다음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박서는 굴 속으로 쇳물을 부어 몽골군을 막고,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몽골군의 수레를 불태워 쫓아냈다. 몽골군이 사람 기름에 불을 붙여 공격하자 박서는 진흙에 물을 부어 불길을 잠재웠다. 몽골군이 다시 건초에 불을 붙여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물을 부어 불길을 잡았다.

점령에 실패한 몽골군은 구주성을 우회해 개경을 공격하고 고려 왕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몽골의 압력을 받아 고려 왕조는 사신을 구주성에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는 응하지 않았다. 국왕이 나서 항복을 권유하자 박서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몽골은 다시 박서의 처단을 요구했다. 무신 권력가 최이(崔怡)는 박서를 고향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 전투에 참여한 70여 세의 몽골군 노(老)장수는 “내가 20세부터 천하의 수많은 성을 공격했으나 이같이 오래 버티며 항복하지 않은 장수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려사』 권103 박서 열전). 박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영웅이 된다.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 희생과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새로운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전쟁을 통해 화려하게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고통받은 수많은 민초들이 그 무대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전쟁의 고통을 겪은 민초들의 얘기 역시 전쟁을 막고 평화를 누리기 위한 역사 서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려 후기에는 삼국부흥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하층민의 봉기, 삼별초 항쟁, 몽골군과의 전투 등 수많은 내란과 전쟁을 겪었지만, 그에 관해 전해지는 민초들의 얘기는 다음의 두 개 기록에 불과할 정도로 간략하다.

 

 

 

권금성(權金城:속초의 외설악 소재). 1353년 몽골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나라 끌려가 종살이하던 모친 구한 김천

 

명주(溟州:강릉) 호장(戶長:향리 우두머리)인 김천(金遷)의 어머니와 동생 덕린(德麟)은 몽골군의 포로가 돼 만주 요양(遼陽:지금 심양)으로 끌려가 각각 몽골 군졸인 요좌(要左)와 천노(天老)의 종이 된다. 김천의 나이 15세 때이다.

 

14년 후 원나라에서 돌아온 백호(百戶:당시 하급 장교) 습성(習成)이란 자로부터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듣는다. ‘나는 살아 있고, 원나라에서 종이 되어 있다.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한 채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는 등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세상을 떠난 줄 알고 제사를 지내오던 김천은 빚을 내어 몸값을 치를 은(銀)을 마련한다. 개경에 가서 국왕이 원나라로 가는 편에 따라가기를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한다. 그는 6년 동안 개경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알던 승려를 만나 군인인 그의 동생이 만주 요양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겨우 허락을 받아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 군졸 요좌의 집에 이르자 한 할머니가 절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명주 호장 김자릉의 딸이다. 형제인 김용문은 과거에 급제했고, 나는 호장 김종연에게 시집가서 해장(海莊:김천)과 덕린(德麟)이란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이미 19년이 되었고, 둘째 아들도 이웃의 종으로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20년 만에야 찾은 것이다. 주인 요좌에게 애걸하여 은 55냥으로 어머니의 몸값을 치렀다. 돈이 부족해 동생은 바로 데려올 수 없었다. 홀로 남은 동생은 ‘만일 하늘이 복을 내리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어머니와 형을 전송했다. 모자는 서로 안고 울었다. 그때 고려 재상 김방경(金方慶)이 귀국길에 이 소식을 듣고 모자에게 증명서를 만들어줘 공로(公路)를 통해 귀국하게 했다. 6년 뒤 김천은 86냥의 몸값을 치르고 동생도 데려왔다(이상 『고려사』 권121 김천 열전).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은 고종(1214∼1259년 재위) 말년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253년(고종40) 10월 몽골군이 양주(襄州:강원도 양양)를 함락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인근의 명주(강릉)도 이때 공격을 받아 김천의 어머니 등도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 김천의 어머니가 포로가 될 당시 고려는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은 해가 1254년(고종41)이다. 이 해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약 20만7000명이나 된다. 사망자는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고려 인구는 5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원나라는 고려인 포로들을 통치하기 위해 1296년(충렬왕22) 심양에 고려군민총관부(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한다. 당시 심양왕(瀋陽王)이란 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고려 국왕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만주의 심양 지역에는 그만큼 고려인이 많이 거주했다.

 

김천의 집안은 대대로 강릉의 지방행정을 맡아 온 토착 향리 출신이다. 김천의 부친과 외조부는 모두 향리의 최상층인 호장이었고 삼촌은 과거에 합격한 진사였다. 호장층은 세습 계층이다. 따라서 김천의 집안은 강릉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 계층이었다. 또한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 모친과 동생의 몸값을 치르고 귀국시킬 수 있었다. 포로 중엔 그렇지 못한 민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포로로 이국으로 끌려가 노비로서 비참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20년 동안 종살이를 했지만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이 귀국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전란에 친부와 시부·남편까지 잃은 조씨

 

고려 말 유학자 이곡(李穀:1298∼1351년)은 1341년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傳)’(『가정집』 권1)이란 전기를 지었다. 그는 전쟁고아와 미망인인 조씨의 삶을 ‘곧게 살아온 여인[節婦]’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곡은 조씨의 집을 구입했는데, 조씨의 손녀사위가 자신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同年)이라는 인연으로 이후 조씨와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기구한 삶을 기록할 수 있었다. 조씨의 삶 속에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사회가 겪은 여러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다.

 

1270년(원종11) 6월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반기를 든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6세인 조씨는 군인인 아버지 조자비(曺子丕)와 함께 삼별초군에 체포되어 삼별초군을 따라 진도로 남하한다. 남하 도중 아버지 조자비는 딸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경으로 귀환한다. 조자비는 다시 고려군에 편성되어 1271년(원종13) 겨울 삼별초군을 정벌하러 탐라(제주도)에 갔다가 전사한다.

 

아버지를 잃은 조씨는 13세 되던 해(1278년) 대위(隊尉:정9품) 벼슬의 군인 한보(韓甫)에게 출가했다. 조씨의 시아버지도 군인이었다. 결혼 3년 만인 1281년(충렬왕7) 여름 조씨의 시아버지는 몽골·고려 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1290년(충렬왕16) 12월 원나라 사람 내안(乃顔)이 만주에서 세조 쿠빌라이에 반란을 일으킨다. 내안의 휘하 장수 합단(哈丹)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다. 충렬왕이 강화도로 피란을 갈 정도로 상황은 위급했다. 원나라는 군사 1만3000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합단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소탕한다. 조씨의 남편 한보는 1291년(충렬왕17) 여름 합단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다. 조씨가 27세 되던 해이다. 조씨는 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어 고아가 되었고, 출가 후 전쟁터에서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잃었다. 이후 77세까지 50년간 과부로서 홀로 지낸다.

 

과부가 된 조씨는 언니의 집에서 기숙한다. 그러다 자신의 딸이 출가하자 딸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그런데 1남1녀를 낳은 딸마저 일찍 죽어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곡은 조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씨는 50년을 과부로 지내면서 밤낮으로 길쌈과 바느질 같은 부녀자의 일을 열심히 했다. 그 덕에 딸과 손자·손녀를 먹이고 입히며 살아갈 터전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 상례와 제례의 비용을 손수 마련하였다. 지금 7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적에게 사로잡힐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근래 정치의 잘잘못이라든가 사대부 집안의 내력 등을 이야기할 땐 하나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곡은 50년 동안 ‘부절’을 지키면서 꿋꿋한 삶을 살아온 조씨를 기리려고 이 전기를 지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전쟁으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남편을 차례로 잃은 후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고단한 삶을 살아온 민초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수많은 내란과 전쟁으로 얼룩진 고려 후기사회를 살았던 민초들의 얘기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은 유감이다.

 

 

 

 

 

하층민들 신분 상승 봇물 … 재상 반열 오르기도

 

고려사의 재발견 원나라 간섭기와 민초(民草)

 

 

충남 천안의 광덕사 앞에 있는 호두(胡桃) 시식비(始植碑오른쪽 아래)와 400여 년 된 호두나무. 유청신의 경제적 기반이 천안이어서 이곳에 처음 호두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역사가 안확(安廓)은 『조선문명사』(1923년)에서 고려의 ‘귀족정치시대’를 움직인 세 집단은 승려, 무신, 폐신(嬖臣)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폐신이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이며, 폐행(嬖倖)이라 부른다. 이들의 행적을 따로 기록한 것이 『고려사』 폐행 열전(권123)이다.

 

폐행 열전엔 주로 원 간섭기에 활동한 55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출신이 밝혀진 인물 가운데 문·무반 출신 관료는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하면 평민(15명), 천민(10명), 상인(2명), 승려(3명), 외국인(7명) 등 미천한 신분이 많다. 사회 밑바닥의 민초(民草)들이 원 간섭기에 국왕 측근이 되거나 지배층으로 진출한 사실은 신분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원 간섭기를 우리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의 하나로 여긴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90년 전에 민초들의 지배층 진출에 주목한 역사가 안확의 안목은 실로 신선하고 놀랍다.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 간섭기는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다.

 

고려 건국 때 반기 든 지역 주민 차별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이다. 이들은 신분상 양인이지만 군현(郡縣)에 거주한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아 사실상 노비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마디로 신분과 현실의 처지에서 양인과 천인의 두 경계를 넘나든 ‘경계인(境界人)’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각종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극복하고 지배층으로 편입된 사실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박구(朴球)는 울주(蔚州:울산) 소속의 부곡인이다. 조상은 부자 상인[富商]이었다. 그 역시 큰 부자[요재(饒財)]로 알려졌다. 원종(元宗) 때 상장군(무반 최고직:정3품)이 되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사령관 김방경과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상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어 합포(지금의 마산)를 지켰다. 찬성사(贊成事:정2품)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박구는 다른 기능은 없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하게 되었다.”(『고려사』 권104 박구 열전)

 

박구(?∼1289년)가 원종(1259∼1274년 재위) 때 무반 최고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고종(高宗:1214∼1259년 재위) 때 처음 군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1274년(충렬왕 즉위연도) 원나라 출신 공주(충렬왕비)가 고려로 올 때 그는 공주의 호위 군사를 맡을 정도로 충렬왕의 측근이었다. 1281년 5월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제2차 일본 정벌에 참전했다. 부곡인이 재상 자리까지 오른 것은 박구가 처음이다.

 

부곡인은 향(鄕), 부곡(部曲), 소(所), 장(莊),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던 주민이다. 이 중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 때 처음 생겨난 행정구역이다. 인구·토지 규모가 작아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한 지역을 주변의 군·현에 소속시킨 소규모 행정구역이다.

 

“지난 왕조(고려) 때 5도와 양계(함경도·평안도)에 있던 역과 진에서 역을 부담한 사람[驛子와 津尺]과 부곡인은 모두 태조 때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고려 왕조는 이들에게 천하고 힘든 일(賤役)을 맡게 했다.”(『조선왕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己巳일 조)

 

위 기록과 같이 고려 정부는 후삼국 통합전쟁 때 왕조에 반기를 든 주민을 향·부곡 지역에 소속시키거나, 소(所)·장(莊)·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만들어 일반 농민들과 차별하고 특별한 역(役)을 지게 했다.

향·부곡의 주민은 국가 토지 경작, 소 주민은 수공업 생산, 장·처 주민은 왕실·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역을 각각 부담했다. 부곡인은 일반 조세 외에 이런 역을 추가로 부담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으며, 대대로 특정의 역을 세습해야 했다. 그들은 관리가 되더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부곡인이 이런 규제와 제약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무신정권 때다. 무신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지나치게 많이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저항운동을 주도한 계층이 부곡인이다. 최씨 정권의 권력자 최의(崔竩)가 1258년 피살되고, 이듬해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는다. 몽골의 압력으로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했지만, 그에 반발한 삼별초의 난은 1273년에야 진압됐다. 이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런 현실은 부곡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 임명권을 장악해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 국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국왕이 되었다.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책봉된 국왕은 국내 정치 기반이 취약해,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측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의 궁중정치가 유행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지배층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을 통해 무공을 세운 사람, 원나라 말에 능통한 역관(譯官), 원나라 왕실의 환관(宦官)이나 공주 집안 사람 등 대체로 4가지 경로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 주류였다. 원 간섭기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편승해 앞에서 말한 부곡인 박구도 충렬왕의 측근이자 재상이 되었다.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출세한 부곡인도 있었다.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인 유청신의 공적을 기린 비.

 

 

“유청신(柳淸臣)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高伊)부곡 출신이다.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비록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에겐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高興)현으로 승격했다.”(『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1329년)은 일본 원정과 원나라 내안(乃顔)의 반란 때 양국 사이의 통역 업무를 잘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1287년(충렬왕 13) 8월 규정에 없는 대장군(종3품)으로 승진한다. 1297년(충렬왕 23)엔 재상 자리에 오를뿐더러 충선왕의 측근이 돼 원에 있던 충선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전담한다.

 

縣 승격으로 부곡집단 해체 가속화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옹주·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