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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경(詩經)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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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한 잎 2014. 8. 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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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詩經) 개론 -  약술.

 

 목차
 
1. 시경이란 무었인가?

2.시경의 연원.

3. 공자와 시경.

4. 삼가시(三家詩)

5. 모시(毛詩)와 모시서(毛詩序)

Ⅵ. <<시경>>의 내용

 1.시경의 내용에 따른 분류 - 風․雅․頌

 1) 국풍(國風) - 160편

 2) 이아(二雅) - 105편

  (1) 대아

  (2) 소아

 3) 삼송(三頌) - 40편

  (1) 주송

  (2) 상송

  (3) 노송


  1. 宗敎詩

  2. 社會詩

  3. 抒情詩


  2. 시경의 작법 - 賦․比․興

    1) 부

    2) 비

    3) 흥

Ⅶ. ≪시경≫의 형식과 기교

1. 시경의 형식과 영향

2. 기교

Ⅷ. <<시경>>의 현실반영과 현실비판

Ⅸ. <<시경>>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

  시경의 평가

Ⅹ. 맺음말
 


 

Ⅰ. <시경>이란?

 

무릇 시가(詩歌)의 시초는 우리 인간이 자연을 찬미하고 신령(神靈)을 송축(頌祝)하기 위하여 제사 드리고 기도드리는 데에서 비롯하였다. 인류는 문자가 있기 전에 언어가 있었고 그 때부터 이미 노래와 춤은 거의 연대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천지신명에 대하여 축제를 올려 소원과 감사를 드릴 때에도 일정한 형식으로 장단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 부르며 빌었었다. 세계 어느 나라 문학의 근원을 살펴보더라도 거의 산문(散文)보다는 운문(韻文)이 먼저 나온 것은 모두 이러한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문학 또한 이 예외는 아니다.

 

<<시경(詩經)>>은 공자(B.C551~479)가 편집했다는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인 동시에 중국 순수문학의 시조이다. 중국 문학은 <<시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리만큼, 시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며, 후세 중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시경에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2500 ~ 3000여 년 전의 시가들을 모아 놓은 책으로서, 대략 西周初(B.C 1100前後)~春秋中葉(B.C 600前後) 성립된 중국의 경전 중에서도 예로부터 가장 존중되어온 경서의 하나이다. ‘시경’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단지 그것을 ‘시(詩)’ 또는 ‘시삼백(詩三百)’이라고 칭하였으며, <<역(易)>>,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과 마찬가지로 ‘경(經)’이란 존칭이 없었다. 물론 전국시대 말기부터 이미 ‘육경(六經: 詩, 書, 樂, 易, 禮, 春秋)’이니 하는 말은 있었지만, 후세의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효경(孝經)>>을 제외하고는 초기에는 모두 서명(書名) 뒤에 ‘경(經)’자를 붙여 ‘시경(詩經)’이나 ‘역경(易經)’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책의 이름으로서 ‘시’ 뒤에 ‘경’자가 붙여진 것은 남송(南宋) 초엽 요강(廖剛)의 <<시경강의(詩經講義)>>가 가장 빠른 듯하다. 그 후에 이러한 기풍은 매우 유행하여 명대(明代) 이후에는 <<시>>, <<서>>, <<역>> 등의 경서에 ‘경’자가 붙여진 말이 더 흔히 쓰이게 된다. ‘경’자는 이들 책을 높이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Ⅱ. <시경>의 연원

 

시경의 판본인 「모시(毛詩)」앞머리에 붙어 있는 서문에 담긴 글의 일부를 보면 음악이란 그 시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래의 가사인 시는 정치를 올바르게 하는 방편이 될 뿐만 아니라, 천지나 귀신까지도 감동시키는 효력을 지녔다. 그래서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이것으로써 정치를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는 것이다.

 

음악이나 노래의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을 무엇보다도 바르게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성격이나 감정에도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이라 생각했던 때문이다.

 

그러기에 훌륭한 임금들은 음악과 시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가짐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다시 그것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순화하고 바르게 만듦으로써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이 백성들이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민요를 채집하는 채시관(采詩官)을 두기도 하였고 백성들의 여론을 임금에게 알리기 위하여 지방장관들이 자기 고장의 민요를 모아 바치는 헌시(獻詩) 제도도 있었으며 천자가 각 지방을 순수(巡狩) 할 때 제후들이 자기 고장의 풍습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써 진시(陳詩)를 하는 제도도 있었다.

 

시경은 이러한 ‘채시’나‘헌시’ ‘진시’에 의하여 궁정에 모아졌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되었을 것이다. 이를 채시설(采詩說), 헌시설(獻詩說), 진시설(陳詩說) 등으로 구분한다. <<시경>>은 이러한 채시관(采詩官)들이 모은 시로 이루어진 것인데, 공자(孔子)가 그것의 편차(編次)를 지금의 형태로 정리하였다.

 


- 산시설 부정 :

 

첫째, 공자 자신이 한번도 시를 산거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둘째, 예의를 기준으로 해서 시를 산거했다고 말한다면 <정풍正風>이나 <위풍衛風> 등에는 어째서 음락한 시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

셋째, 소위 逸詩라고 하는 시가 <<논어(論語)>에 나타나는데 주지하다시피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서 편찬된 책인 만큼 그들의 스승이 산거해버린 시를 그 제자들이 다시 수록한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넷째, 소위 일시라고 전해오는 시 가운데 <<논어>>에 있는 <당체지화(唐棣之華)>4구와 <<좌전(左傳)>>에 있는 <수유사마(雖有絲蔴)> 4구, <사아왕도(思我王度)>에 있는 5구 등은 조금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다.

다섯째, 다른 제자서들에서 시를 말할때면 언제나 3백편으로 말해왔다.

여섯째, <<논어의 기록에도 있듯이 공자는 “서술하되 짓지 아니하고 믿어서 옛 것을 좋아한다.” 하였으므로 전해오던 옛 시를 결코 임의로 산거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Ⅲ. 공자와 <시경>

 

1. 공자가 시경에 대해 무한한 흥미와 관심을 가졌고 전문적인 안목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따라서 <<시경>>은 고대부터 이미 유가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문학작품이지만 문학작품보다는 먼저 유가의 경전으로 인식되어왔다.

 

2,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전해지던 저작들을 정리해서 육경이라 했는데, <<시경>> 역시 육경에 포함되어 공자의 정리를 거친 후에 더욱 존중되고 널리 읽히게 되었다.

 

-공자는 왜 <<시경>>을 제자들을 교육하는 교과서로 채택했을까?

<<論語 ․ 爲政>> :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論語 ․ 泰伯>> : 興於詩, 入於禮, 成於樂 시로써 뜻을 일으키고 예로써 행동 절차를 세우며 악으로써 덕을 이룩한다.

<<論語 ․ 季氏>> : 學詩乎…不學詩, 無以言 시를 배웠는가? … 시를 배우지 못했으면 더불어 할 말이 없느니라.

 

* 시의 효용 : <<좌전>>에 ‘시’의 용도를 밝히고 있는데, ① 대아 송처럼 천자나 왕후의 전례에 쓰이고 ② 윗사람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고 ③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수단으로 쓰이고 ④ 외교사절들이 외교 활동을 할 때 시로 서로의 마음을 암시하는 습속이 있었다.

 


Ⅳ. 삼가시(三家詩)

 

한초(漢初)에 <<시경>>을 전한 사람으로 신배공(申培公)과 원고생(轅固生) 및 한영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금문(今文)으로 된 ≪시경≫을 전하였으며, 후세에 이들을 ‘삼가시(三家詩)’라 부르게 되었다.


1. 제시(齊詩) : 제나라 사람인 원고생이 전한 시. 위대(魏代)에 없어졌다.

2. 노시(魯詩) : 노나라 사람인 신배공이 전한 시. 서진(西晋)시대에 없어졌다.

3. 한시(韓詩) : 연(燕)나라 사람인 한영이 전한 시. 삼가시 중에서 생명이 가장 길어 당 대(唐代, 또는 北宋)까지 존재하였으며, 지금도 <<외전10권(外傳十 卷>>>이 전해지고 있다.


서한 때에 성행한 삼가시가 모두 후세에 전하지 않게 된 것은 삼가시를 공부한 학자들이 학관으로 출세하는 대신 경(經)을 빌어 그 시대의 정치원리를 설명할 목적으로 시의 대의를 억지 해석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즉 그 시대의 정치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시의 대의 파악은 곧 그 시대가 지나고 나면 거의 가치가 없는 게 되고 말기 때문에 삼가시는 일찍이 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Ⅴ. 모시(毛詩)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가시는 일찍이 실전되어 송대 이후로는 고문(古文)인 <<모시(毛詩)>>만이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통 읽고 있는 <<시경>>이란 모두가 <<모시>>인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모시(毛詩)>> 29권과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30권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뒤의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오래된 시경의 판본이며 그 해설서이다.

 

<<모시>>는 조(趙)나라 사람인 모공(毛公)이 전한 시를 말한다. 모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대모공(大毛公)은 모형(毛亨), 소모공(小毛公)은 모장(毛이라는 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모시>>에는 맨 앞머리에 자하(子夏)의 작(作)이라는 <대서(大序)>가 있고, 각 시의 앞머리에는 자하와 모공의 합작이라는 <소서(小序)>가 있어 시의(詩意)를 설명하고 있다.

 

삼가시에 비하여 <<모시>>는 서한 때 학관에 오르지 못하여 비교적 착실한 훈고에 노력하고 있고, 동한 때에 <<모시>>를 보충 해설한 <<전(箋)>>을 쓴 정현(鄭玄) 같은 대학자가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모전(毛傳)>>이 유일하게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1. 모시서의 내용 :

 

1) 시의 기본특징에 대한 인식 : ‘詩言志’

가)‘志’, ‘意’, ‘情’의 의미 :

 

- 공영달 : 선진시기에는 ‘지’가 ‘의’와 ‘정’을 포괄하는 의미

- 문일다 : ‘시’와 ‘지’는 동일자로서 기억, 기록, 생각의 의미

- 한대에 와서 ‘정’이 ‘지’에서 의미분화되어 희노애락경애의 육감으로 변질

 

나)溫柔敦厚 : 정서의 표현방법

 

 

2)詩,樂과 시대정치와의 관계

 

가)敎化와 諷刺

나)變風과 變雅

 

3)시경의 형식적 분류와 표현방법 : ‘六儀’


3. 모시서의 한계

1)유가문학정신의 응축, 시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피력함.

2)문학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에 편중함으로써, 문학자체의 예술성을 외면

3)온유돈후의 관점으로 인해, 문학이 갖는 적극적 비판기능이 축소 왜곡됨

 


※毛詩序

 

《關雎》,后妃之德也,風之始也,所以風天下而正夫婦也。故用之鄉人焉,用之邦國焉。風,風也,教也,風以動之,教以化之。

詩者,志之所之也,在心為志,發言為詩,情動于中而形于言,言之不足,故嗟嘆之,嗟嘆之不足,故詠歌之,詠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情發于聲,聲成文謂之音,治世之音安以樂,其政和;亂世之音怨以怒,其政乖;亡國之音哀以思,其民困。故正得失,動天地,感鬼神,莫近于詩。先王以是經夫婦,成孝敬,厚人倫,美教化,移風俗。

故詩有六義焉:一曰風,二曰賦,三曰比,四曰興,五曰雅,六曰頌,上以風化下,下以風刺上,主文而譎諫,言之者無罪,聞之者足以戒,故曰風。至于王道衰,禮義廢,政教失,國異政,家殊俗,而變風變雅作矣。國史明乎得失之跡,傷人倫之廢,哀刑政之苛,吟詠情性,以風其上,達于事變而懷其舊俗也。故變風發乎情,止乎禮義。發乎情,民之性也;止乎禮義,先王之澤也。是以一國之事,系一人之本,謂之風;言天下之事,形四方之風,謂之雅。雅者,正也,言王政之所由廢興也。政有大小,故有小雅焉。頌者,美盛德之形容,以其成功告于神明者也。是謂四始,詩之至也。

 

※모시서 해석

 

<<관저>>는 후비의 덕이라. 풍습(가르침)의 시작이라. 천하를 가르치는 까닭으로 부부를 올바르게 함이라. 그러므로 향인들이 사용하고 나라가 사용한다. 풍은 가르침이요 교화이니 풍으로써 그것을 움직이고 교로써 그것을 조화한다.

시라는 것은 뜻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뜻한다 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을 시를 짓는다고 한다.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어 말로 표현하는데, 말로 부족하기 때문에 감개하고 탄식하며, 감개와 탄식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에 소리를 길게 하고 노래하며, 소리를 길게 하고 노래하여도 부족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짓하고 춤을 추며 발짓하고 구른다.

감정이 소리로 표현되고 소리가 무늬를 이루는 것을 음악이라고 한다. 태평한 시대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정치가 화평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시대의 음악은 원망하고 분노하니 정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망국의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백셩들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득과 실을 바로잡고, 천지를 움직이고, 혼령과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에 시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 선왕은 이것으로써 부부를 다스리고 孝와 敬을 이루었으며 인륜을 두텁게 했고 교화를 아름답게 하여 풍속을 심었다.

그러므로 시는 여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風이요, 둘은 賦요, 셋은 比요, 넷은 興이요, 다섯 雅요 여섯은 頌이라 한다. 윗사람은 풍으로써 아래를 교화시키고 아랫사람은 풍으로써 윗사람을 나무란다. 문장을 주로 하여 넌지시 간하므로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風이라 말한다. 왕도가 쇠미함에 이르자 禮와 義가 황폐하고 정치와 교화가 바름을 잃으며 나라마다 정치가 달라지고 집집마다 풍속이 달라지므로 변풍과 변아가 지어졌다. 국사는 정치득실의 자취를 밝히고, 온상이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며 형정이 가혹함을 애통하여 성정을 읊어서 군왕을 풍자하여 세상일이 변하였음을 통달하게 하고 옛 풍속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므로 변풍은 감정에서 발생하여 예의에서 귀속된다. 감정에서 발생함은 백성들의 본성이고, 예의에서 귀속됨은 선와의 은택이다. 이 한 나라의 일로써 한 사람의 근본이 이어져 이르기를 風이라 한다. 천하의 일을 말하고, 사방의 風을 나타냄을 이르러 雅라 한다. 雅라는 것은 올바름이요, 왕의 정치의 폐하고 흥함에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에는 작음과 큼이 있는데 그러므로 작은 雅가 있고, 큰 雅가 있다. 頌이라는 것은 성덕(성대한 덕)의 모습을 아름답게 하고 그로써 공(업적)을 이루어 신명자에게 고한다. 이것을 이르러 사시라하고 하고 시의 이르름이다.

 


Ⅵ. <시경>의 내용

 

<<시경>>에는 모두 305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이들은 다시 풍(風), 아(雅), 송(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외에도 <<모시(毛詩)>> 가운데는 내용은 없고 제목만 남아 있는 것이 6수가 있다.


1.시경의 내용에 따른 분류 - 風․雅․頌


풍이란 것은 민속가요의 시이다.

風者, 民俗歌謠之詩也.

 

아라는 것은 바른 것이며 악(樂)을 바르게 하는 노래이다.

雅者. 正也, 正樂之歌也.

 

송이란 것은 성덕을 찬미하는 형용으로써 그 성공을 신명에 알리는 것이다.

頌者, 美盛德之形容, 以其成功告於神明者也. <詩大序>

 


1) 국풍(國風) - 160편

 

국풍은 주남(周南) ․ 소남(召南) ․ 패(邶) ․ 용(鄘) ․ 위(衛) ․ 왕(王) ․ 정(鄭) ․ 제(齊) ․ 위(魏) ․ 당(唐) ․ 진(秦) ․ 진(陳) ․ 회(檜) ․ 조(曹) ․ 빈(豳)의 15개국으로부터 채집한 그들의 민요라고 하겠다.

 

그런고로 시경 305편중 에서 가장 생동적이고 소박하며 동시에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 내용은 남녀간의 사랑을 묘사한 것을 위시하여 농촌 생활을 묘사한 것, 전쟁과 전시를 증오 저주한 것, 또 그런가 하면 무(武)를 숭상한 것, 수렵의 일을 기술한 것, 군사를 찬미한 것, 효성을 그린 것, 정치인을 풍자한 것, 불평을 토로한 것, 신세를 타령한 것, 이상적인 세계를 연모(戀慕)한 것, 그리고 인생무상을 노 래한 것 등등 실로 그 어느 분야에도 언급하지 않은 곳이 없다.


(1)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가슴에 가득한 분노와 한, 아 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을 묘사한 것으로 <칠월(七月, 風)>, <벌단(伐檀, 魏風)>, <석서(碩鼠, 魏風)> 등이 있다.

 


坎坎伐檀兮, 置之河之干兮, 河水淸且摙猗. 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

不狩不獵, 胡瞻你庭有縣貆兮? 彼君子兮, 不素餐兮! < 魏風 「伐檀」>

쩡쩡쩡 박달나무 찍어내어 찍은 나무 물가에 쌓아두누나 강물은 맑고도 잔잔하구나.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건만 어찌하여 조 3백전을 가지는고?

사냥도 안 하건만 어이하여 네 뜰에 담비가 걸렸는고? 여보소 군자님들 공밥이야 안 먹겠지!

 


(2) 가혹한 부역과 병역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한을 묘사한 것으로 <보우(羽, 唐風)>, <파부(破斧, 빈풍)>, <동산(東山, 빈풍)>, <무의(無衣, 秦風)> 등이 있다.


王事靡盬, 不能蓺稷黍. 父母何怙?

悠悠蒼天, 曷其有所? < 唐風 「鴇羽」>

왕님 부역 멎지 않아 피 기장도 못 심겠다. 부모님은 누굴 믿노?

아득한 푸른 하늘이여, 언제나 편안하리?

 


(3) 병역이나 요역에 나간 정인(征人)들이 고향과 처실을 그리는 시도 있는데 < 王風 「揚之水」> 등이 있다.


(4) 노동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시


采采芣苡, 薄言采之. 采采芣苡, 薄言有之.

采采芣苡, 薄言掇之. 采采芣苡, 薄言捋之.

采采芣苡, 薄言袺之. 采采芣苡, 薄言襭之. < 周南 「芣苡」>

 

다보록한 질경이를 한잎 두잎 따보잔다. 다보록한 질경이를 한잎 두잎 따 넣잔다.

다보록한 질경이를 한잎 두잎 줍는 다네. 다보록한 질경이를 한잎 두잎 훑는다네.

다보록한 질경이를 옷자락 쥐고 따 담으세. 다보록한 질경이를 옷자락 질러 따 담으세.


(5) 남녀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있는데, <건상(裳)>, <출기동문(出其東 門)>, <진유(溱洧)>(이상 鄭風), <목과(木瓜), <상중(桑中)>(이상 衛風), <대거(大 車)>, <채갈(采葛)>(이상 王風), <정녀(靜女, 패풍)> 등은 청춘남녀의 사랑의 감정 을 자연스럽게 표출한 아름다운 시편이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사랑의 결 실을 거두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여인의 불행을 노래한 <장중자(將仲子, 鄭風)>, <맹 (氓, 衛風)>, <곡풍(谷風, 패풍)> 등도 있다.


(6) 통치계층의 황음무도함을 폭로하고 풍자한 것으로 <신대(新臺, 風)>, <남산(南山, 齊風)>, <주림(株林, 陳風) 등이 있다.

 


2) 이아(二雅) - 105편

 

이아는 곧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말한다. 이는 국풍이 여항풍토(閭巷風土)와 남녀 의 정사를 그린 것이 많은데 비하여,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의 제사(祭祠)․음연(飮燕)에 관한 시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조정지악가(朝廷之樂歌)라고 말한다. 기술 방면에 있어 서는 허탈하여 진지한 맛이 없으므로 국풍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내용을 훑어보면 제 사나 음연을 묘사 서술한 것을 비롯하여 개인의 전기(傳記)를 서술한 것, 위정자를 풍자 한 것, 모자(母子)나 남녀의 애정을 그린 것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사실(史實)을 서술한 것은 아주 차서(次序)가 정연하여 이른바 사시(史詩)의 평(評)이 있다.


(1) 대아

총 31편이며 조회에 사용되던 음악으로 축복과 훈계를 노래한 가사이다. 가창의 대상은 주로 천자, 군자, 가빈(嘉賓)과 같은 통치계층들이었으며, 그 내용은 대체로 귀빈을 접 대하는 것, 제후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 병사들을 위로하는 것 등이다.

대아 중에서도 <생민(生民)>, <공유(公劉)>, <면(綿)> 등의 5편은 후직(后稷),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부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것으로 내용이 생동감 있고 조리가 분명하여 민족사시(民族史詩)라 일컬어진다. 어떤 것들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 하여 그들의 조상을 신격화하였지만 그 속에 노동인민의 지혜와 역량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대아와 소아의 시들은 대부분 사대부들의 작품으로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허탈하여 진지한 맛이 없으므로 국풍에 비할 바가 못 된다.

 


文王在上 於昭於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

문왕께서 위에 계시니, 오 성덕이 하늘에 빛나도다. 주(周)는 비록 옛 나라지만, 그 명(命)하심 은 유신(維新)이로다. 이러니 주나라가 두드러지지 않으랴, 상제(上帝)와 천명이 때를 맞추었다 하지 않으랴. 문왕의 혼령이 하늘을 오르내리며, 언제나 상제의 곁에 있도다.

 

亹亹文王 令聞不已 陳錫哉周 侯文王孫子 文王孫子 本支百世 凡周之士 不顯亦世

부지런히 수고한 문왕이시여, 그 훌륭하신 모범이 누리에 가득하도다. 크신 성덕 내리사 주나라 를 창업했네. 아 문왕의 자손들이여, 문왕의 자손은, 위대한 전통을 백세에 기리니, 무릇 주나 라의 인사라 하면, 또한 대대로 빛나지 않은 이 없네.

 

世之不顯 厥猶翼翼 思皇多士 生此王國 王國克生 維周之楨 濟濟多士 文王以寧

성덕이 대대로 빛나지 않음이 없으니, 그 같은 모범으로 공경하고 삼가, 그토록 많은 어진 인사 가, 이 왕국에서 태어났네. 왕국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 이들은 주나라의 기둥일세. 나라 안 에 가득한 많은 인재가, 문왕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도다.

 

< 문왕지십(文王之什) 「문왕(文王)」7장 >

 


(2) 소아

총 74편이며(제목만 있는 6편을 포함하면 80편) 잔치하고 즐길 때의 음악이다. 이것 들은 대부분 주왕실의 쇠퇴와 평왕(平王)의 동천(東遷)이라는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탄 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현실을 비판하고 상란(喪亂)을 반영한 시도 많다. 그 중 에서 <초지화(苕之華)>와 <하초불황(何草不黃)>은 통치계층의 착취와 이에 대한 백성들 의 분개를 표출한 것으로 대중적 색채가 강하다.


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 吹笙鼓簧 承筐是將 人之好我 示我周行

저기 우는소리는 사슴의 소리, 들에서 쑥을 뜯고 있네.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 오셨으니, 비파도 뜯고 피리도 불리. 피리를 불고 황(簧)을 두드리니, 광주리의 이 폐백도 받아 주시오. 어느 사 람 나를 좋아하거든, 나에게 좋은 길 가리켜 주오.

 

呦呦鹿蒿 食野之蒿 我有嘉賓 德音孔昭 視民不恌 君子是則是傚 我有旨酒 嘉賓式燕以敖

저기 우는 것은 사슴의 소리, 들에서 쑥을 뜯고 있네.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 오셨으니, 그 덕망 이 매우 높으시고, 백성을 가벼이 보지 않으시면, 군자도 족히 본받을 만하네. 나에게 향기로 운 술 있으니, 아름다운 손님과 잔치를 벌이세.

 

呦呦鹿鳴 食野之芩 我有嘉賓 鼓瑟鼓瑟 鼓瑟鼓瑟 和樂且湛 以有旨酒 以燕樂嘉賓之心

저기 우는 것은 사슴의 소리, 들에서 금(芩)을 뜯고 있네. 내게 아름다운 손님 오셨으니, 비파 와 거문고를 뜯어보네. 비파․거문고의 흥겨운 소리, 화락하고 즐거움의 끝이 없네. 나에게 향기 로운 술 있으니, 아름다운 손님의 마음 즐겁게 하리.

 

< 녹명지십(鹿鳴之什) 「녹명(鹿鳴)」3장 >

 


3) 삼송(三頌) - 40편

 

삼송은 곧 주송(周頌) ․ 상송(商頌) ․ 노송(魯頌)이다. 주송 31편, 노송 4편, 상송 5편이다.

송(頌)’은 ‘형용’ 또는 ‘모습’이라는 ‘용(容)’과 상통하는 것으로 노래에 춤을 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송’의 내용은 제사지낼 때 신을 찬양하거나 조상 들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이다.

 

따라서 송이란 곧 송찬(頌讚)의 뜻이며 종묘지악(宗廟之 樂)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삼송의 내용은 모두가 무가(舞歌)나 악가(樂歌) 혹은 제가(祭 歌)들로써 천지신명의 공덕을 찬송하는 것을 비롯하여 신에게 축복을 비는 것, 제시(祭 時)의 정경을 묘사한 것, 제물(祭物)을 서술한 것 등이 많고, 그밖에도 농가 생활을 묘사 한 것, 사실(史實)을 기술한 것 등이 있다.

 

(1) 주송

주송에는 후손으로서 천자의 직을 올바로 감당치 못할까 두려워하며 선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 1,2편 있기는 하나, 전혀 애탄이나 책망 또는 혼란과 실정을 표시 하는 노래들은 없다. 그리고는 전편이 기쁨과 존경 또는 풍년이나 승리를 노래하는 내용 들이다. 그리고 전혀 압운치 않은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주송은 시경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주초(周初)의 성세(盛世)의 작품들인 듯하다.


於稷淸廟 肅雝顯相 濟濟多士 秉文之德 對越在天 駿奔走在廟 不顯不承 無射於人斯

오오 그윽하고도 청결한 사당이여, 엄숙하고 경건한 제후들이 모습, 사당에 참례한 그 많은 인 사들, 문왕의 높은 덕을 친히 받들어, 하늘에 게신 조종(祖宗)들도 모시며, 사당에 배알하며 종 종걸음을 치네. 어찌 이 정성에도 나타나지 않으시랴, 사람들이 우러르며 싫어하는 법 없네.

 

< 청묘지십(淸廟之什) 「청묘(淸廟)」>


(2) 상송

상송은 은(殷)나라 후손인 송(宋)나라의 노래인데 송나라의 당시 임금에게 아부하는 내 용을 담은 「은무(殷武)」와 같은 작품이 섞여 있다.


置我鞉鼓 奏鼓簡簡衎我烈祖 湯孫奏假 綏我思成 鞉鼓淵淵 嘒嘒管聲 旣和且平 依我磬聲 於赫湯孫 穆穆厥聲 庸鼓有斁 萬無有奕 我有嘉客 亦不夷懌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顧予烝嘗 湯孫之將

땡땡이북 큰북을 갖추어 놓고, 북 치는 소리 둥둥둥, 빛나는 우리 조상 기쁘게 하는 도다. 탕왕 의 후손이 올리는 풍악이리니, 편안히 이 곳에 강림하소서. 북 소리는 점점 멀리 퍼지고, 피리 소리 맑게 곁들이니, 이미 화음으로 변하도다. 경쇠 치는 소리가 어울리게 되니, 오 빛나도다 탕왕의 후손이여, 그 소리 참으로 아름답도다. 장고 소리 북 소리 끊이지 않고, 뜰에는 방패춤 한창인데,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 또한 마음으로 즐거워하네. 아주 옛날 그 옛날부터, 선인들 이 시작해 온 제례(祭禮)이니, 조석으로 공경하고, 공손히 일에 힘쓰네. 부디 이 제사를 돌보시 라, 성탕의 후손이 받드옵니다. < 「나(那)」>

 

(3) 노송

노송 4편은 춘추 전기 노(魯)나라에서 조상과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음악이다. 모두가 살아 있던 희공(僖公)을 송미하는 작품이다.


駉駉牡馬 在坰之野 薄言駉者 有驈有騜 有驪有黃 以車彭彭 思無彊 思馬斯臧

헌칠하고 살찐 수말들이, 먼 들판에서 노니는데, 참으로 헌걸차다고 할 만하니, 가라말에 희고 누런 말 하며 검정말에 싯누런 말들이로다. 수레에 미면 펄펄 나는 듯, 희공의 생각 깊고도 멀 어, 말도 살찌게 잘 먹인 것이로다.

 

駉駉牡馬 在坰之野 薄言駉者 有騅有駓 有騅有騏 以車伾伾 思無期 思馬斯才

헌칠하고 살찐 수말들이, 먼 들판에서 노니는데, 참으로 헌걸차다고 할 만하니, 오추마 하며 공 골골. 절따말도 있고 철총도 있도다. 수레에 매면 씩씩하게도 달리니, 희공의 생각 깊고도 멀 어, 견디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로다.

 

駉駉牡馬 在坰之野 薄言駉者 有驒有駱 有駵有雒 以車繹繹 思無斁 思馬斯作

헌칠하고 살찐 수말들이, 먼 들판에서 노니는데, 참으로 헌걸차다고 할 만하니, 총이말에 갈기 검은 말 하며, 원따말도 있고 가리온도 있도다. 수레에 미면 쏜살같이 치달으니, 희공의 생각 한결같아서, 말들이 펄쩍 뽐내 보이네.

 

駉駉牡馬 在坰之野 薄言駉者 有駰有騢 有驔有魚 以車祛祛 思無邪 思馬斯徂

헌칠하고 살찐 수말들이, 먼 들판에서 노니는데, 참으로 헌걸차다고 할 만하니, 총이말에 붉은 부루말 하며, 무릎 흰 말도 있고 눈이 흰 말도 있도다. 수레에 미면 늠름하기도 하지. 희공의 생각 티없이 맑아, 말도 힘차게 잘 달리네. < 경지십(駉之什) 「경(駉)」4장 >


※ 시경의 작품들을 풍․아․송으로 분류하는 방법 외에도 제송(祭頌)이나 무술(巫術)적이고 신화적인 것을 종교시, 서사적이고 풍자적인데다가 정치적인 것들은 사회시, 개인적이며 풍토적인 것들을 서정시로 하는 3분법이 있다.

 

 

1. 宗敎詩

문학사의 초엽을 장식하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나 조상에 대한 추념(追念), 그리고 무술적인 것들을 종교적인 단계로 볼 수 있는바, 시경에서는 文 ․ 武 ․ 成 ․ 康 ․ 昭王 등 四周의 聖王을 제사하거나 그 공을 가송(歌頌)했던 시편들의 모임인 周頌을 그 대표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 중 文王을 祭한 維天之命은 성왕의 은덕을 천상의 은덕과 견주면서 백성에게 끼친 무궁한 혜택을 신봉한 노래였다.


維天之命, 於穆不已,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假以溢我, 我其收之. 駿惠我文王, 會孫篤之.

<周頌 「維天之命」>

오직 저 천도 있어 영원히 아름다워라. 오! 어찌 빛나지 않을까? 저토록 순수한 문왕의 덕이. 크게 우리를 보살펴, 우리는 늘 그 은혜 속에 살리라. 높으신 문왕의 은덕을 우리 자손들 길이 받들 리라.

 


2. 社會詩

문학이 종교의식과 귀족오락의 차원을 넘어 사회와 민중의 광장으로 진화될 때 시는 樂舞와의 혼합관계를 벗어나고, 종교적인 부용(附庸)지위를 떠난다. 더구나 산업의 발달과 사회구조의 개화는 정치의 복잡화와 귀족 평민간의 충돌로 사회는 어두운 색채가 만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병란의 부담이 늘고 역사(役事)의 괴로움 때문에 옛날의 단순한 경천경조(敬天敬祖)적 종교관념은 커다란 동요를 가져온다. 雅속에 절대수와 國風속에 일부가 보류된 사회시는 그 제촌에 따라 사(史)시, 연엽(宴獵)시, 전쟁시, 농민시, 풍자시의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殷商支旅, 其會如林, 矢於牧野, 維予侯興. 上帝臨女, 無貳爾心! 史詩, < 大雅 「大明」>

상나라 군사 벌떼처럼 나와, 군사의 창검은 수풀을 이루어, 목야의 큰 벌에 진을 쳤는데, 무왕이 외치며 하는 말 내 마침내 일어났노라. 상제께서 너희를 굽어보시는 도다. 두 마음 갖지 말지니 라!

 


3. 抒情詩

시경 300편 가운데 서정시는 사회시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시경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국풍의 십중팔구는 이 서정시에 속한다. 주자의 풀이대로 민간의 가요로서 남녀언정의 풍시 속에는당시의 애정 및 혼인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한 것들이다. 애정의 추구․연애의 애환․결혼의 갈등․ 행역중인 남편의 그리움․이별의 슬픔 등 다양한 남녀연정을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風雨淒淒 鷄鳴喈喈 旣見君子 云胡不夷 風雨瀟瀟 鷄鳴膠膠 旣見君子 云胡不瘳 風雨如晦 鷄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 < 鄭風 「風雨」>

비바람 축축하고, 닭의 울음 요란한데, 이미 그대 만나고 나니, 어이 아니 마음 편하리. 비바람 쓸쓸하고, 닭의 울음 요란한데, 이미 그대 만나고 나니, 어이 아니 병 나으리.

비바람 캄캄하고, 닭 소리 쉬지 않는데, 이미 그대 만나고 나니, 어이 아니 기쁘리.

 


2. 시경의 작법 - 賦․比․興


직접 그 이름을 지적하고, 직접 그 일을 서술하는 것이 부이다.

直指其名, 直叙其事者, 賦也.

 

사물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비이다.

引物爲說者, 比也.

 

본래 어느 한 가지 일을 말하려다가 따로 다른 두어 구절을 끌어내어 이에 따라 접속시 켜 나가는 것이 흥이다.

本專言其事而虛用兩句鉤起, 因而接續去者, 興也.

 


이와 같이 부는 직서법(直敍法)을 말하는데, 인류활동을 서술하여 정감을 일으키는 것, 외부의 구체적인 사물의 경상(景象)을 묘사하여 정감을 일으키는 것. 사물을 협서(夾敍) 해 정감을 일으키는 방법이 있다.

 

비는 비유법(比喩法)을 가리킨다. 읊으려는 내용이나 사상, 감정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 비유할 사물을 찾게 된다. 비유하는 사물과 비유되는 사물간의 공통적 특징을 갖는다. 수 식의 범위가 좁으며 간결하다.

 

흥은 먼저 다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본제를 끄집어내는 수법이다. 먼저 이야기되는 소위 다른 것과 본제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연관성이 있는 것이라 해도 시가의 본의와 관련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본의와는 관계없이 정서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면에서나 관련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다만 운율에 관련되는 것도 있다. 아마도 흥 이란 작자의 주관적 연상을 읊은 것일 것이다. 주관적인 연상이란 객관적인 설명이 불 가능한 것이다. 똑같은 강물을 본다 하더라도, 어떤 이는 덧없는 인생을, 어떤 이는 지난 날의 사랑을, 어떤 이는 떠나온 고향을, 어떤 이는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어떤 이는 자 애로운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부

牧人乃夢 衆維魚矣 旐維旟矣 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豊年 旐維旟矣 室家湊湊 < 小雅 「無羊」>

목동들은 꿈을 꾸네. 메뚜기와 물고기가 보이네. 구사기와 새매 깃발 보이네. 어른에게 점을 쳐 보게 하니, 메뚜기와 물고기는, 풍년 들 꿈이로고. 구사기와 새매 깃발은, 집안이 번창할 꿈이 로다.


->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이 전원의 정경이 펼쳐져 있다. 양들의 움직임과 목동들 의 행동이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전원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양의 무리, 소의 무리들을 접한 시인은 풍년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목동의 꿈은 이런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의 수법을 쓰지 않고 꿈이 주는 이미지를 통해 아름답게 나타냈다. 한편 이 시는 周代 농업 사회 속에서 숙련된 목축사업을 반영하고 있으며 목축생활을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고 익숙해 있었다 는 사실을 나타낸다.


2) 비

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逝將去女, 適彼樂土,

樂土樂土, 爰得我所. < 魏風 「碩鼠」>

 

큰 쥐야 큰 쥐야, 우리 기장 먹지 마라. 3년 너를 섬겼건만 날 아니 돌보긴가.

이제 너를 떠나 저 즐거운 땅으로 가련다. 즐거운 땅, 즐거운 땅, 거기 가면 내 편히 살으리라.

 

-> 비유하는 내용은 시사(詩詞)속에 드러나지 않고 은연중에 작가 자신의 정의(情意)를 표현할 수 있는 비법도 있다. 이 방법은 사실을 풍자하거나 찬미할 때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가난에 고통 받는 백성들이 가렴주구가 심한 정치를 풍자한 시이다. 쥐를 의인화 하여 작자의 의도를 나타내었다. 쥐는 곡식을 파먹는 습성을 가진 동물로, 농자들의 큰 해충이다. 군주가 마치 쥐와 같은 해충으로 여겨질 정도니 횡포가 심함을 드러내 준다. 고대 봉건사회에서 군주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군주를 함부비판 할 수 없었으며, 군주의 횡포로 인한 어려운 처지를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런 시는 간서(諫書)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3) 흥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 周南 「關雎」>

 

사이 좋게 우는 저 징경이, 하수가에 있네. 곱고 고운 아가씨는, 임의 좋은 짝이로세.

올망졸망 조아기풀, 이리저리 뒤적이네. 곱고 고운 아가씨를 자나 깨나 찾고 있네.

찾아도 만나지 못하니, 자나 깨나 그리네. 아! 아득도 해라 잠 못 이뤄 뒤척이네.


-> 맨 처음 서두의 한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은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원래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베필이다 라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단조 롭고 솔직한 것이 싫어서 먼저 關關雎鳩 在河之洲 라는 구를 썼다. 이렇듯 흥은 무엇인 가를 말하기 위해 그 앞에 먼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수법

 


Ⅶ. ≪시경≫의 형식과 기교


1. 시경의 형식과 영향

<<시경>>의 구절은 거의 대부분이 사언(四言)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세에 사언시(四言詩)는 바로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시경>>에는 단지 사언(四言)만 있는 것은 아니다. 二言, 三言, 五言, 六言, 七言, 심지어는 八言까지도 있었다.

이렇듯 다채로운 언어형식은 물론 당시의 자유분방한 감정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후세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여 한대(漢代) 교사가(郊祠歌)가 사용한 三言, 비명(碑銘)의 四言, 악부(樂府)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四言, 六言, 절구(絶句), 율시(律詩), 오언(五言), 칠언(七言) 등등이 모두 <<시경>>의 형식에서 적든 많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 기교

<<시경>>의 표현수법으로 볼 수 있는 ‘부비흥(賦比興)’과 작품분류로 볼 수 있는 ‘풍아송(風雅頌)’을 합쳐 전통적으로 ‘육의(六義)’라 불렀다. 모두 문학표현에 있어서 기본적이고도 요긴한 기교인데, <<시경>>에서는 대단히 두드러지며 아울러 후세의 운문(韻文)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도 인물이나 사물묘사의 생동적이고도 섬세함이며 또 언어의 대비, 반복 및 첩자(疊字), 쌍성(雙聲), 첩운(疊韻) 등등을 사용한 수법 등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풍유론(諷諭論)이란 지식인의 현실참여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문학적 표현기교를 밑거름으로 훌륭한 지식인의 소명의식의 작용으로 풍유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 전제정치의 창칼 속에서도 민중들의 입장에서 의연하게 바른 목소리를 냈던 훌륭한 사회시(社會詩)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후대 시인들이 계승하여 몇 천 년 동안 전통적인 예술적 기교로 자리 잡았다.

 


Ⅷ. <<시경>>의 현실반영과 현실비판

 

<<시경>>은 당시의 시대상을 여실하게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시풍은 다시 한대(漢代)의 악부시(樂府詩)로 이어지고,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두보(杜甫)나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훌륭한 작가가 등장하여, 현실비판시(現實批判詩)를 다량 창작하게 되었다.

 


Ⅸ. <<시경>>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

 

<<시경>>이 창작된 시대는 대략 주대(주대)로부터 춘추전국(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 시기에 관한 문헌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시경>>을 통해 당시의 각종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시경>>에는 당시의 각종 풍습이나 관혼상제(관혼상제)에 관한 서술이나 묘사가 있으며, 이런 대목은 물론 민속학 연구에 요긴한 자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경>>의 용어나 구절을 연구하면 중국어의 변화과정 및 각종 문법현상을 살필 수 있는데, 이것은 언어학 연구에 있어서 가히 보고라 평가되고 있다.

 


시경의 평가

 

先秦時代 시경의 면모를 알아보는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은 孔子인데, 공자 가 인식한 시경의 공용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시를 사용하여 성정을 함양할 수 있다는 수신의 용도이다. 둘째는 시를 빌려서 세무(世務)에 통달한다는 정치의 용도이다. 셋째는 시를 사용하여 언어를 단련하는 용도 등이다. 이처럼 선진시대에는 시경의 공용으로써 그 실용성이 크게 강조되었으며, 그 실용성은 크게 외적으로는 시를 사용한 언어의 훈련을 통한 응대, 논리의 설득력 증대와 내적으로는 덕성의 함양이라 할 수 있다.

 

漢代는 선진시대의 실용정신 속에서도 특히 정치적 간서와 논리․도덕적인 표준으로써 시 경의 가치가 인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경의 가치가 파악된 이유는 한 대가 유교를 국교로 삼아 사상을 통제하고 통일을 꾀한 데 있다. 한대에는 百家는 學官에서 파 출(罷黜)되고 經學만이 설치되어 경(經)학자들은 통치자의 뜻에 영합하여 경서를 통치의 수단으로 부회(附會)시켜 해설하였는데 시경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경은 정치의 도구, 또는 통치자를 위한 논리․도덕의 헌장(憲章)으로 연구되었으며, 더 나아가 시경을 간서로 삼아 시의 본의와는 동떨어진 한대의 특유한 시경이 만들어졌다. 한 대 이후에도 시경 연구는 계속되어 隋․唐代에도 시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한 대에 詩敎思想을 모두 역사와 배합시켜 윤리적 해석을 추구한 毛詩와 미자설(美刺說)과 정변설을 강조한 정현(鄭玄)을 존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경 향은 宋代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으니 그것은 모시의 유풍(遺風)에서 탈피한 것 이었다.

 

宋代에 시경을 해석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이전의 설들을 회의하 는 풍조로써 소서(小序)를 의심하고 모시정전(毛詩鄭箋)을 의심했으며, 심지어는 305篇 전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篇章의 순서를 바꾸기까지 하였다. 둘째는 실증적 태도로서 특별히 시경의 문자․명물․지리 더 나아가 시경의 자료의 수집을 중시하고, 채집하 는 작업을 중시하여 三家詩 정리에 심혈을 쏟았다. 특히 朱子가 쓴 《詩集傳》은 古代 經師의 구속에서 탈피하여 시 본문에 나아가 詩義를 구하는 방법을 취하여 커다란 영향력 을 행사하여 元․明 兩朝에 걸쳐 지금까지 그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淸代의 시경 연구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 원을 지배함에 따라 청대초기 滿淸을 반대, 明朝를 그리워하거나 이민족의 문자를 비평하 는 행위의 금지 하에서 이루어진 漢學의 발달, 즉 시경에 나오는 명물의 고증과 훈고의 유행을 들 수 있다. 둘째, 삼가시의 부흥을 들 수 있다. 셋째, 시경에 관한 문자학과 성운학 의 발달이다.

 

이상 역사 속에서의 시경 연구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선진시대는 실용적 관념에서 시경을 해석했고, 한대는 실용적 정신 속에서도 시경의 권계작용(勸戒作用)을 특히 강조했으며, 송대에는 주자를 중심으로 한 시경 해석의 수정시기로써 시에 나아가 시의를 찾는 시기였 으며, 청대는 한학의 발달로 인한 훈고와 문자․성운 연구의 발달이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최근 5․4 운동 이후에는 시경을 순문학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있다.

 

시경의 중심을 이루는 민가들은 옛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활상과 감정을 꾸밈없이 반영하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과 괴로움, 평민들이 겪는 부당한 노고, 전쟁의 비 정함 등이 시속에 생동하고 있다. 허나 이것들이 기록되고 전승되면서 이 시들의 본질은 간과하고 통치자들의 정치적 수단이라는 비문학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 5․4운동 이후 에 현대인들은 시경을 순문학이라 하여 시경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대부 들의 노래인 雅나 頌을 제외한 거의 모든 風의 작품들은 그 당시 만들어질 때는 평민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시경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자들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문학을 위한 문학, 즉 순문학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Ⅹ. 맺음말

 

<시경>은 주대(周代)에 있어서 북방 문학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 문학의 원천(源泉)이다. 시경은 그 당시 연로무자(年老無子)하고 의지할 곳 없는 남녀 민간인들에게 채시관(採詩官)이라는 직책을 주어서 의식(衣食)을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천하를 주유하면서 각 지방의 민요를 수집케 함으로써 채집된 바의 일종의 시집인데, 태사(太師)는 이것을 천자에게 바쳤고 천자는 이를 통해서 각 지방의 풍속과 백성들의 고락과 원성 등을 파악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자료로 삼았었다.

 

그러나 비단 정치뿐만이 아니라, 시경의 내용에는 사회 경제 ․ 외교 ․ 문화 ․ 군사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았으면 더불어 할말이 없다.”(不學詩․無以言)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시경 은 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후세의 4언 ․ 5언 ․ 7언 시나 부(賦)등은 모두 시경으로부터 받은 바의 영향이 다분히 있고 또 산문이나 기타 문학 분야에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심지어는 인근 여러 나라에까지 그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으니 실로 시경이야말로 동양 문학의 연원(淵源)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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