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 기자
92년까지 ‘예비고사+본고사’ ‘학력고사’ 시절
신군부가 들어선 80년까지 입시정책은 ‘예비고사+본고사’ 체제였다. 먼저 전국적인 예비고사를 치르고 이 점수를 바탕으로 희망 대학에 지원해 다시 대학별 본고사에 응시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지나치게 본고사를 어렵게 출제하면서 학교 수업 불신, 사교육 의존 심화 등 문제가 발생해 7·30 교육개혁조치로 폐지됐다. 이후 12년 동안 학력고사라 불리는 교과목 위주 시험이 대학별 논술, 면접 등과 병행해 치러졌다. 하지만 학력고사 역시 ‘암기 위주 시험’이라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93년 탈교과·통합출제 원칙의 수능시험이 도입됐다.
93~95년 원조 수능 세대의 비극
학력고사를 바라보며 초·중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에게 첫 수능은 ‘별 천지’와 같았다. 암기가 중요시됐던 학력고사와 달리 창의력, 통합교과, 문제해결력 등 생소한 문제들로 수험생의 혼란이 컸다. 특히 93년 8월과 11월 두 번 치러진 수능 시험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서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의 원성을 샀다. 거대한 입시 제도의 변화 앞에서 큰 혼란과 좌절을 맛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4년에는 1회 시험으로 수능이 바뀌면서 문항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0.6점부터 2점까지 영역 및 난이도에 따라 배점이 달라졌다. 95년에는 언어와 외국어 등에 교과서를 벗어난 다양한 지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96~97년 역대 최악의 ‘불수능’
200점 만점에서 400점 만점으로 처음 바뀐 96년 수능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험으로 통한다. 이 시험은 너무 어려웠다는 의미에서 불수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수능 난이도는 해가 바뀔 때마다 냉온탕을 반복하게 된다. 97년부터는 정부가 대학별 본고사를 금지하면서 수능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졌다. 수능일인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기로 결정된 날로 청년 실업난, 대학생 신용 불량자 등이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98~2000년 역대 최악의 물수능
98년 수능은 6차 교육과정에 따라 처음으로 탐구 영역에서 선택 과목 제도와 표준점수제가 도입됐고 수능 최초로 만점자(1명)가 배출됐다. 표준점수는 성적의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냈다. 99년에도 쉬운 수능이 계속돼 ‘물수능’의 효시가 됐다. 2000년은 역대 최악의 물수능으로 전 영역 만점자가 66명이나 됐다. 380점 이상 고득점자도 3만5000명이 넘었다. 본고사 폐지 후 수능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진 상황에서 ‘물수능’은 입시 대혼란을 초래했다. 실제로 수능 만점자 중 1명이 서울대에 떨어지는 사태도 발생했다.
2001년 이해찬 세대의 탄생
2001년 수능은 수년째 이어진 물수능에 대한 기대 속에서 난데없이 또다시 불수능으로 돌아가면서 수많은 수험생을 울렸다. 수험생이 고1이었던 99년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이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뀐다’고 말했던 것에 빗대 ‘이해찬 세대’로 불린다. 이전 세대보다 느슨한 환경에서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접한 수험생들이 1, 2교시만 치르고 고사장을 빠져나갔다. 전체 수험생의 평균점수가 66.5점(400점 만점)이나 폭락했고 만점자는 한 명도 없었다. 특히 시험 중간 학생이 자살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수능이 끝나고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쉽게 출제한다는 정부 약속을 믿었다가 충격을 받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생각할 때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2002~2003년 복수정답 인정, 수능 신뢰도 먹칠
2002년 수능은 수험생들에겐 소수점까지 표기해 성적을 통보하고 대학에는 반올림한 점수를 제공해 ‘점수 역전’ 현상이 빚어졌다. 2003년부터는 문항별 배점이 모두 정수로 바뀌었고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태가 발생해 수능 신뢰도에 금이 갔다. 출제자 명단까지 사전에 유출돼 수능 관리체계 문제점도 도마에 올랐다.
2004~2006년 선택과목 간 유불리 커 ‘로또 수능’
2004년부터 문·이과 수험생들은 각각 과학과 사회탐구 영역에서 4과목씩만 선택해 볼 수 있게 돼 입시 부담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선택 과목 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유불리 현상이 뚜렷했다. 시험 당일에는 휴대전화를 이용한 입시 부정행위가 적발되기도 했다. 2005년과 2006년 수능은 선택과목 간의 격차가 더욱 커져 로또 수능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수능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휴대전화, MP3 플레이어 등 전자기기를 시험장에서 소지할 수 없게 됐다.
2007년 1년 만에 막 내린 수능 등급제
노무현정부 마지막 해였던 2007년 수능은 등급제를 도입해 성적표에 1~9등급만 표기토록 했으나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바로 폐지돼 2007년 수험생들은 ‘모르모트(실험용)’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수능 점수 발표 직후 단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수험생들의 비난이 잇따랐다. 일부 영역에서는 한 문제만 틀려도 1등급을 못 받는 사태도 발생했다.
2008~2009년 때 아닌 아랍어 열풍
2008년 수능부터는 1년 만에 수능 등급제 폐지로 성적표에 원점수를 제외한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을 같이 표기했다. 사회·과학과 같은 선택 과목인 제2 외국어 영역에서 응시자 수가 가장 많았던 일본어를 제치고 아랍어가 1위에 올랐다. 가르치는 학교가 많지 않아 조금만 노력해도 점수를 쉽게 올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009년 이후에도 아랍어는 계속 응시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0년 EBS 70%의 함정
연초 안병만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EBS 70% 연계 발언으로 수능이 쉽게 출제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산됐다. 이후 EBS 교재가 불티나게 팔리고 EBS를 강의하는 학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만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실제 수능은 전년보다 훨씬 어렵게 출제됐다. 결국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2011년 1월 EBS 70% 연계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이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수능 만점자를 1% 수준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만점자 1%, 물수능 대혼란 예고
지난 2일 실시된 모의고사가 쉽게 출제되면서 역대 가장 쉬운 수능이 예상된다. 변별력이 떨어져 입시 대혼란이 벌어진다는 것과 실수로 성적이 갈리게 될 것이라는 등 벌써부터 부정적 전망이 우세하다. 물수능에 대한 기대와 함께 탐구영역 선택 과목 수도 4개에서 3개로 줄어 입시 전문가들은 많은 재수생이 유입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학생 사이에서 치열한 수시 경쟁이 점쳐진다. 2009년부터 본격화된 입학사정관 전형은 지난해 118개 대학 3만6896명(9.6%)에서 122개 대학 4만1250명(10.8%)으로 확대된다.
2012년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도입, 수능 A·B 형 출제
2012년부터 읽기·듣기·말하기·쓰기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이 도입된다. 이르면 2015년 가을 현재 중2가 치르는 수능부터 영어시험을 대체할 전망이다. 실용 능력을 중시해 문법 문제는 아예 출제되지 않는다. 2013년 현재 고1이 치르는 수능은 국어·영어·수학 과목별로 출제된다. 지금처럼 언어·수리·외국어라는 알 듯 말 듯한 복잡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 수능 역사상 처음으로 기존보다 쉬운 A형, 현재 수준의 B형 등 수준별 시험이 도입된다. 국어·영어 문항 수도 현행 50개에서 40~45개로, 사회·과학 탐구영역의 선택과목 수도 2개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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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교육 갖고 장난치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2011.06.09 00:24 / 수정 2011.06.09 00:46논설위원
수능 난이도를 교육 전문가들이 조절한다고? 천만에! 한국에선 대통령의 의지가 좌우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쉬운 수능이 원칙이었다. ‘물 수능’이 이어졌다. 그 절정이 1점 차이로 학과가 아니라 지원 대학이 뒤바뀐 2001학년도 수능이었다. 온갖 음모론이 판쳤다. 부담을 느낀 정부는 다음해 최악의 ‘불 수능’ 카드를 꺼냈다. 그 희생자가 ‘이해찬 세대’다. 수많은 수험생이 시험을 치다 고사장을 울며 떠났다. 나흘 뒤 김 대통령은 “정부 약속을 믿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충격을 드려 유감”이라고 사과했다. 곧바로 지지도는 15%로 추락했다.
노무현 정부도 수능에 손을 댔다. 대표적 실험이 2008학년 수능 등급제였다. 서열화를 막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1점 차이로 억울하게 등급이 엇갈리는 폐단(弊端)을 낳았다. 1등급 학생들조차 입시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행정소송이 난무했다. 그해 실험도구가 된 학생들은 자신들을 ‘저주받은 89년생’이라 불렀다. 등급제는 욕만 잔뜩 먹고 일년 만에 폐지됐다. 지지율 폭락으로 노 정부는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
올해 수능도 불길한 조짐이다. 휘황찬란한 다짐들을 너무 많이 쏟아냈다. “수능 과목별 만점자 1%” “EBS와 연계율 70%”…. 하지만 벌써 역풍이 거세다. 평가원이 EBS 교재를 베껴서 낸 6월 모의고사부터 도마에 올랐다. 수험생들 입에서 “물 수능은 내년 선거를 위한 포퓰리즘”이란 표현이 나돈다. “정부 압력에 반발한 평가원의 쿠데타”라는 음모론까지 퍼지고 있다. 사이버 공간은 사설학원 원장이 올린 ‘수능은 죽었다’라는 동영상이 장악했다. 평가원 게시판의 424개 글 가운데 400여 개가 비난 일색이다.
이제라도 섣부른 약속부터 거둬들여야 한다. 그나마 전두환 정부는 힘으로 졸업 정원제를 밀어붙여 입시 과열을 잠재웠다. 지금은 그런 극약 처방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스스로 욕심부터 자제해야 한다. 단칼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입시 과열을 적절히 관리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수능 역사상 지난 3년은 별 탈 없이 넘어간 축이다. 그런데도 평가원장을 교체하고, 정치권과 정부가 친절하게 수능 난이도까지 주문하고 있다. 이제라도 평가원의 판단을 믿고 “적절한 수능을 출제해 달라”는 선에서 멈추는 게 옳을 듯싶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내년을 고비로 수능 응시자는 해마다 2만 명씩 줄어든다. 올해 초 아이들이 없어 최대 유아복 업체인 베비라가 파산했다. 한때 시가총액 1조4000억원을 넘보던 사교육업체 M사의 시가총액은 1조원으로 줄었다. 눈치 빠른 외국인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손을 뺐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이들을 대상으로 너무 많은 실험을 했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라도 결국 그들 가슴을 멍들게 했을 뿐이다. 지긋이 참고 지켜보는 게 어른 세대의 도리일지 모른다. 더 이상 교육을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한다. 정치가 수능에 개입하면 항상 뒤끝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