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책읽기

(책) '사랑'에 관한 정의

순한 잎 2009. 4. 30. 11:16

몇 해 전에 읽었던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이란 책을 다시 집어 읽어보았다.


정신분석학자 스캇펙박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아주 독특하게 내려놓았다.

흔히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등 다양한 범주로 나눠놓지만, 스캇펙박사는 사랑에 대해,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해 놓았다.

자신이 내려놓은 정의는 목적론적 정의여서 과학자들이 탐탁지 않게 여길지 모르나, 이것은 오랫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겪은 임상적 경험속에서 도달한 결론이라고 한다.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성장에도 기여를 하는 ‘진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즉 사랑은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다는 것이며, 인류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스캇펙박사는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대해 하나씩 말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말한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에 ‘사랑에 빠진다.’라는 말해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특별히 ‘성적인 것과 관련된 애욕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식을 아무리 깊이 사랑해도 사랑에 빠지지는 않으며,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음을 써주기는

하나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사랑에 빠진다.’ 는 말 자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적으로 자극되었을 때를 말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은 ‘개인의 자아 영역’ 일부를 과감히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의 자아 영역’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 되는 황홀한 경험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아 영역’을 폭포처럼 쏟아 붓고 거기에 따라 고립된 자아 영역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 사랑과 더불어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된다고 느끼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상황을

무아지경으로 경험하게 된다. ‘나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다, 고독은 더 이상 없다.’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퇴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기들이 어머니와 하나가 되었던 기억과 같은 것이다.

신생아들은 ‘자아’와 ‘외부세계'를 하나라고 느낀다. 자아와 외부세계의 경계와 구분을 알지 못함이다.

아기들은 성장해가면서 비로소 자신이 외부세계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뼈아프게

느낀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착각인 것이다. 어릴 때 경험했던 전지전능함을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 두 살짜리 아이가 환상을 깨어 나가듯 사랑에 빠진 두 사람도 환상에 찬물을 끼얹으며 결국

서로 떨어진 별개의 두 개체가 됨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럼 참사랑은 무엇인가.

한 쌍의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 나올 때 그때서야 비로소 참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자아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며 사랑이란 ‘자아 경계(인간한계)를 확장하고 상대방의 성숙까지도

도와주는 범위' 라는 것이다.


스캇펙 박사는 부부간의 결합역시 서로가 분리된 개체라는 점을 깨달아야만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자신의 근본적 외로움에 겁을 먹어 서로 하나가 되는 결혼에만 탐닉하는 자들은 훌륭한 결혼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또는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주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갈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언자 칼릴지브란이 결혼에 대해,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로 말한 것처럼

부부란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이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들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말라.

당신 부부 영혼들의 해변 사이에는 저 움직이는 바다가 오히려 있도록 하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는 마시지 말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각 홀로 있어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계 속으로는 침범하지 말라.

생명의 손길만이 당신의 심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말아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칼릴지브란) 

 

사랑에 관한 정의도 매우 이성적이며 날카롭지만, 이에 따른 부부관 역시 매우 현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부부관을 이토록 합당한 이론으로 명쾌하게 정돈해 놓다니! 즐거운 책읽기가 아닐 수 없다.

남편에, 혹은 마누라에 목매는 자들이여! 이심이체라는 것을 명심하라.